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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라
청공자 2학년 조은샘
나는 내가 느끼는 바를 잘 모르겠다. 정확히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뭘 어떻게 느꼈는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 나는 이럴 때 이미 있는 단어나 예시들로 내 심정을 표현해내려고 한다. 예를 들어 강독 시간에는 ‘공자님이 예를 중시해서 예로서 답하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예는 예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또는 책을 읽고 요약할 때는 내 생각을 쓰는 게 아니라 책의 생각을 문자만 줄여서 그대로 따라 쓴다.
내가 느끼는 바를 알지 못하고 이미 있는 뜻을 대신 말하면 상황이 많이 곤란해진다. 상대방은 내가 뭘 말하고 있는지 몰라 혼란스러워지고, 나는 내가 느낀 게 있는 것 같은데 전달은 되지 않는 상태가 벌어진다. 빨리 대답해야 할 때는 뱉은 단어 뜻대로 느끼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말하면서 오해를 산다. 정리하자면 나는 ‘나’로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스스로 소외감만 느낀다.
이번에 『윤리적 노하우』를 읽고 내가 느낀 바를 설명할 ‘단어’나 ‘예시’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정확히 알고 말해야 할 객관적인 앎이나 뜻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저자 바렐라씨가 말하기로 안다는 건 추상적이거나 논리적인 것, 그리고 정의된 것, 즉 홧(What)을 아는 게 아니다. 구체적이고 체화된 것, 그리고 상황적인 것, 하우(how)를 통해서 직접적인 행위로 무언가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외부에 어떤 정의된 앎이 정확하게 있는 게 아니라면, 나의 직접적인 행위로서 앎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나는 느끼는 바를 어떻게 앎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익숙한 것에서부터
맹자가 윤리적 훈련을 기반 –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평범함 노하우 – 으로써 활용하는 사례와 그것을 확장하는 방법의 핵심은 우리가 모든 기술들에 적용하는 학습 원리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구나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기술을 익히기 시작해서, 적용되는 영역을 넓혀가는 방식으로 그 기술을 보다 더 복잡한 상황으로 확장해 간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가정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은 지적 주의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일에 대하여 주의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윤리적 노하우』, 유권종·박충식 옮김, 갈무리, 56쪽
저자 바렐라씨는 맹자의 윤리적 훈련법인 확장, 주의, 지적 주의력을 언급한다. 먼저 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행위의 확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았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아이를 구하러 간다. 이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안다. 바렐라씨는 우리의 즉각적인 도덕적 반응을 복잡한 상황에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위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일상에서도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게 옳은 행동인지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판단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아이를 구하러 갈 때와 같이 도덕성이 발현될만한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상황을 겪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는 ‘주의력’이 더 중요하다.
성찰하는 훈련
느끼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단어나 적절한 예시를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주의 깊게 보고 성찰하는 게 더 중요하다. 책을 쓴 저자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느낀 바를 정리해서 잘 개념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배운다는 건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느낀 것들로 배운 것을 다시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공자님이 예를 중시하신 상황에서의 맥락을 내 삶 속에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하고, 책을 요약할 때는 저자의 말을 내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주의 깊게 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성찰한다는 건 어떤 걸까? 공자님이 예를 중시하신 상황을 만약 나의 삶 속에서 느껴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마지막에 와서 문득 들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자신의 삶에 그만큼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아도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낀 것과 경험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주의 깊게 보려고 해도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겠다. 주의 깊게 본다는 건 관심과도 연결되어있다.
그렇기에 나는 저자 바렐라씨가 맹자같은 현인은 공동체의 전면적 참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51p, 같은책)라고 말한다 생각한다. 나를 관심 있고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관계 속에 있을 때여서이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책을 읽으며, 혹은 타인을 만나면서 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느낀 바를 어떤 상황과 ‘만났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훈련 속에서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