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지금 우리 공부는

지금 우리 공부는

허무한 삶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게시물 정보

작성자 이하늘 작성일23-03-11 20:48 조회153회 댓글1건

본문


안녕하세요. [위대한 정오 : 선데이 니체] 세미나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하늘입니다.

[위대한 정오 : 선데이 니체]는 저(하늘), 보라샘, 영주샘이 함께 여는 <니체 전집 읽기> 세미나인데요. 저희는 이 세미나를 통해 니체를 만나고, 니체의 사유를 느껴봄으로써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냥 책 읽고 세미나 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분명 저희의 미덥지 못한 두뇌가(?)

공부했던 것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크겠죠?

때문에 돌아가면서 이 연재방에 각자 공부한 것을 중심으로 연재글을 써보기로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즌 1에서는

『니체, 그의 삶과 철학』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북캠퍼스,와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프리드리히 니체, 책세상, 을 읽습니다.





허무한 삶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

1844년 10월 15일 독일의 조그마한 시골마을 뢰켄에서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태어난다. 사실 철학을 잘 모르더라도 한 번쯤은 ‘니체’라는 이름이나 ‘신은 죽었다’와 같은 말은 들어봤을 테니 니체의 철학이 가진 위상과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니체는 왜 이렇게 유명한 것일까? 그는 어떤 이야기를 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니체가 정말 위대한 철학자라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니체 평전, 그중에서도 삶의 전반부를 통해 그가 어떤 문제를 다뤘는지, 또 그의 철학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가볍게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신은 죽었다’라는 말부터 출발해보고 싶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서 ‘신’이란 무엇을 뜻할까? 사실 신을 떠올려보면 나의 머릿속에는 따뜻하고 밝은 빛 같은 존재, 나를 보듬어 줄 것 같은 손길, 왜인지 모르겠지만 맑은 하늘, 구름 뭐 이런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아마 성당에서 보았던 그림이나 사진이 무의식 속에 각인됐기 때문일 테다. 생각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oh my god”하고 외치며 신을 찾아대지만 사실 그 신이란 굉장히 모호한 이미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연히 니체가 죽음을 선고했던 신은 이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 것 같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신’이란 뭐였을까?


“니체의 ‘이런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정식은 ‘신은 죽었다.’이다. 니체는 이 표현 안에 모든 신의 대리물, 다른 세계, 궁극적 실재, 사물자체, 본체적 차원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 등 인간의 ‘형이상학적 요구’ 전체와 그것의 산물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신’이라는 이름 아래 포함되었거나 포함될 수 있을 모든 것들을 담고자 했다.”

『니체, 그의 삶과 철학』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북캠퍼스 124p


니체가 말하는 ‘신’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현상, 즉 인간 인식의 너머, 피안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니체에 따른다면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물자체’, 쇼펜하우어는 ‘의지’ 역시 모두 ‘신’이라는 상징 안에 포함된다. 서양 철학계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우리 인식 ‘바깥, 저쪽’에 위치시키고 지금 현상의 세계를 그 저쪽 세계로부터 파생된 무엇으로 보려는 하나의 경향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니체는 바로 그 ‘저쪽’을 ‘신’의 세계라 불렀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우리 삶의 문제, 가치, 의미 역시 ‘저쪽’으로부터 온 무언가가 되며, 우리는 그러한 바깥을 쫓아야 하고 외부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니체는 그런 신에게 ‘죽음’을 선포한다. 즉,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란 바깥의 세계는 없고, 오로지 우리의 인식, 우리의 신체성 위의 세상만이 있을 뿐이라는 외침과 다름없다.


니체 vs 다윈, 니체 vs 허무주의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신의 죽음을 말한 사람이 니체뿐만은 아니었다. 랑에라는 철학자도 그렇고, 슈트라우스라는 사람도 그랬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우리에게 진화론으로 익숙한 다윈을 꼽을 수도 있다. 다윈은 인류가 순전히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진화를 통해 발전해온 것을 밝힘으로써, 우리 존재의 배후에는 어떠한 의도와 의미도 없다는 것 역시 함께 밝혀냈다. 그러나 다윈은 딱 거기까지였다. 신의 죽음과 가치의 죽음을 선포했지만, 그 이후의 방향은 이야기하지 않은 채 도망가버린 것이다. 니체는 그 문제를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신의 죽음, 가치의 죽음은 세계의 붕괴와 다름없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거대한 질문과 직면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진정한 적수는 신이 아니라 다윈이었다. 니체는 다윈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다윈의 행보에는 동의할 수는 없었기에 그를 넘어설 새로운 철학을 제시해야만 했다.


이처럼 다윈이 열어젖힌 ‘세계’에서 가치를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허무주의자’라 부를 수 있다. 사실 니체 전기를 읽기 전 허무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그저 무기력한 상태만을 떠올렸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무언가를 탐닉하고, 쫓아가며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도 ‘허무주의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본능적 욕망을 따르기가 쉬워진다. 이를테면 욜로족처럼 오늘의 나를 만족시키는 음식, 오늘의 나를 만족시켜줄 쾌락을 찾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개인의 안락함과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이러한 모습은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정리하자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내 삶에 가치를 ‘알 수 없는 바깥, 신’에게 위치시키고 맹목적으로 따르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이거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아무런 양식없이 살아가는 ‘허무주의자’이거나 둘 중에 하나다. 니체의 철학은 이 둘 사이에 포획되지 않고 둘 사이를 가로지르려는 대담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니체가 신의 죽음을 가볍게 이야기하고, 자유로운 해방으로 받아들였던 여느 과학자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그건 아마 니체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내 생각에 니체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은 상당히 중요했으며, 그것의 죽음은 앞서 말했듯 정말 세계의 ‘붕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우선 그는 1849년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의 사망, 1850년 동생 요제프의 사망, 1855년과 1856년에 각각 고모 아우구스타와 할머니 에르트무테의 사망을 겪으며 가까운 주위 사람들에 대한 상실을 맛본다. 비록 어린 시절이긴 하나 ‘가족의 상실’, 특히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니체에게 굉장히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죽음’은 흔히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신적인 사건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따라서 이 설명 불가능한 사건을 니체가 ‘기독교적’으로 해석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일 테다.(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린 시절 독실한 신자기도 했다.) 그러니까 니체에게 기독교는 자신의 존재와 세계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가치였고,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믿음 체계였다. 기독교를 믿었기에 한동안은 평화를 얻을 수 있었을 테니까. 나 역시 어린 시절 꽤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항상 ‘인간의 죽음’과 같은 자연적 일이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두려웠지만 천국 같은 것을 독실하게 믿으면 믿을수록, 그 믿음에 입각해 행동하면 행동할수록(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선행을 베풀면 천국에 갈 수 있다든가) 마음이 평화로웠던 기억도 난다. 다시 돌아오자면 니체 개인에게는 믿음 체계의 붕괴가 곧 ‘신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다윈이나 다른 철학자들에게 ‘신의 죽음’이 강 건너 불구경 같은 일이었다면, 니체에게는 정말 존재의 근간이 흔들리는 경험이었던 것! 니체가 이 문제에 그토록 진지하게 임할 수 있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았던 것, 자기 자신을 무질서한 상태에 방치할 수 없었던 것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사실 이러한 허무주의의 극복에 대한 해답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니체를 공부하며 알아가 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의 내가 ‘신을 믿거나’, ‘허무하거나’ 한 삶을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금의 힌트를 얻어보자면 니체는 그 해답을 그리스인들에게서, 또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에서 찾았다. 그러면 가치가 아무리 붕괴 되어도 스스로 창조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삶에 형식을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삶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김성필님의 댓글

김성필 작성일

지난 위대한정오 세미나에서 다윈 이후 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한 뒤 좌절하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독 니체가 신의 죽음 이후 삶의 이유(?) 찾고자 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눴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때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의문이 하늘샘의 글을 보며 풀렸습니다!
기독교는 니체의 유년기부터(실은 그의 태생과 그 이전부터)큰 영향을 미쳤기에 그것이 자신안에서 붕괴되었을 때의 여파는 그것에 비례하거나 더 강했을텐데, 저는 그 부분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네요ㅎㅎ
니체의 삶을 잘 정리해주신 하늘샘의 글 덕분에 책을 읽을 땐 저자(이번 책에서는 니체겠지요?)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만난다는 느낌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새겨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세가지 옵션, '허무하거나', '신을 믿거나' 아니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거나'. 세번째 옵션을 니체와 함께 탐구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