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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할 땐 자기 극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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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라보라 작성일23-03-18 21:48 조회152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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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할 땐 자기 극복을!


보라 (위대한 정오 - 선데이 니체 세미나)


니체 평전을 읽으며 신기했던 것은 니체의 시대에도 허무주의가 팽배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사회도 허무주의의 위기가 찾아왔었다고 니체는 말하죠. 다른 동물들이 허무를 느끼는지 어떤지는 다른 동물이 되어 본적이 없으니 알 수 없습니다만, 일단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혹은 인간도) “허무함”을 느끼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이 허무라는 친구가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하며 찾아오죠.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나아가 자신과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이 허무 친구 덕분에 몇 번의 퇴직을 했고, 자신을 찾아 배낭을 싸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연구실에 오게 된 것도 허무로부터 등 떠밀려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였죠.

“허무하다”고 말할 때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삶에 의미가 어디 있어 그냥 사는 거야!” 혹은 “곧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거야!”하고요.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너에게 의미 있는 삶을 직접 만들어가며 살아!”라고요. 허무주의에 대한 니체의 처방은 “자기 자신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자기를 극복”하라! 였습니다.


절대적 가치는 없지만, 가치 없이 사는 것도 답은 아니야

우리는 언제 허무함을 느낄까요? 허무하다고 하면서 왜 허무하다고 느끼는지는 잘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서 자신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 혹은 삶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허무함을 느낀다고 했는데요. 이 상태는 “이것(지금)보다 더 좋은 게 있을 거야”와 같습니다. 삶은 원래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르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지금보다 더 좋은 걸 바라고 있다는 상태는 동일하죠. 그렇다면 가치로운 것을 찾으면, 더 좋은 걸 찾으면 우리는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엇이 가치있는 삶일까요?

니체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살면 돼”라고 말해주던 신이 존재하던 세계였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죠. 우리 모두 신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 왔으며 신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러면 천국이라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다윈이 나타나 인간을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자연이며, 심지어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선언을 합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소명을 받아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생겨난 동물 중 하나가 됩니다. 이 세계를 설명하는데 더 이상 신은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당시 자유사상가들은 다윈의 이론을 환영했습니다. 마치 졸업하는 학생이나 퇴직하는 회사원과 같은 기분이었겠군요(얏호!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는 자유닷!). 니체는 이러한 자유사상가들을 비판합니다. ‘신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가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가치를 느끼지 못할 때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게 되죠. 신을 죽인 인간은, 이제 인간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야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받았습니다. 니체가 보기에 자유사상가들은 이 과제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라는 과제(?)는 하지 않고, 사람들은 신의 자리에 직접 앉습니다. 진화론에 따라 자신들이 진화의 끝에 있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죠. 이로 인해 지난 모든 인류의 역사는 물론이고 모든 생명체는 이제 진화의 종점인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느끼며, 자신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다 살아본 것처럼 느끼며, 자신을 “세계사적 과정의 최종 목표”라고 생각하게 되죠. 이에 니체는 탄식합니다. “(...)이제 인류의 역사는 동물과 식물의 역사의 연장일 뿐이다. 가장 깊은 심해에서도 역사적 보편주의자는 하찮은 생명체로서의 자신의 흔적을 계속 찾아낸다. (...) 그는 세계사적 과정이라는 피라미드의 상층에 뽐내며 서있다.(『반시대적 고찰』, 2편 9절)

세계사적 과정의 최종 목표에 다다른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역사의식으로 인해 너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사는 인간입니다. 그들은 많고 다채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교양있는 문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니체가 보기에 이들은 그저 많은 지식과 정보에 짓눌려 있는 인간들이었습니다(제 얘기인 듯하여 무척 찔렸습니다^^;). 너무 많은 선택지 속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인간 말이죠. 이는 우리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정보와 지식이 많으면 좋은 선택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선택을 어렵게 만듭니다. 결국 머릿속으로만 늘 무언가를 도모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않고 있죠. 실제로 겪어보기도 전에 이미 너무 많은 경우의 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릿속만 비대해집니다. 니체는 이런 인간들 또한 허무함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

"도덕"의 정체는 '힘을 향한 욕망'이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좋은 가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인간에게 가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가치로운 것들은 왜 가치롭게 느껴지는지 “심리학적인 관찰”을 하기 시작합니다. ‘현명함’, ‘절제’, ‘용기’, ‘정의’와 같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대해 숙고하며 그 기원을 찾는 것이죠. “형이상학적인” 성질들을 “비-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이 시도를 통해 니체는 “도덕적 기원은 두려움과 힘을 향한 욕망”(239쪽)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동물 세계 전체와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 또한 “자신을 쫓는 사냥꿈을 피하려”고 하며(두려움), “먹잇감을 쫒을 때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힘을 향한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덕이라고 칭송하는 도덕들의 기원을 잘 따라가 보면 결국 나에게 해를 주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두려움)과 나에게 이롭고 유익한 것을 취하고자 하는 욕망(힘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것이죠. 문명은 이러한 도덕의 관습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따르는 대부분의 도덕은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롭다고 여겨지기에 추구했거나, 해롭다고 여겨져서 피했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형이상학적 기원이나 초자연적인 구속력을 빼앗긴 도덕은 결코 “영속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을 만들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느꼈던 “필요”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도덕들은 있지만 도덕성 그 자체는 없다.(레지날드J. 홀링데일, 『니체, 그의 삶과 철학』, 김기복, 이원진 옮김, 북캠퍼스, 251쪽)

이제 도덕의 기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덕에 대한 새로운 의미도 갖게 되었죠! 도덕은 나에게 해로운 것을 피하고, 이로운 것을 취하기 위한 것으로 나의 삶에 필요한 것입니다. 식물에게는 이산화탄소가 이롭(필요하)고, 인간에게는 산소가 이롭(필요하)듯, 모든 존재에게는 자신만의 도덕이 필요합니다. 가치있는 것이 모두에게 제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혹은 공동체)과 같이 내 삶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명령하듯 주어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19세기 자유사상가들처럼 없어서도 안 되는 것이죠. 따라서 니체는 자신만의 도덕을 만들라고 말한 겁니다.

앞서 니체가 밝힌(?) 도덕의 기원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허무를 느끼지 않는 순간도 바로 이 도덕의 기원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에 위협을 느끼거나, 반대로 고양되고 있다고 느낄 때 삶의 의미를 찾지 않습니다^^; 니체는 특히 후자를 흥미롭게 여겼는데요. 인간의 도덕들을 탐구하며 힘은 “직접적인 만족이 거부되면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심리적인 욕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약하고 고통받는 자들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실제로는 작은 힘을 얻기 위한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정심은 그들에게 ”나는 약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형태의 힘, 즉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주는 힘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50절)

니체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힘에의 의지(힘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허무는 힘을 느끼지 못할 때 찾아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힘을 느낄 수 있을까요? 우선 힘은 독립적으로,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필요하죠. 혼자서는 힘을 느낄 수 없습니다.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보다 힘이 센지, 약한지 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와의 힘의 차이 속에서 나의 힘(그리고 상대의 힘도)을 느끼는 것이죠.



자신을 향한, 자신만의 도덕을 가질 것!


지금까지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이 존재했고, 따라서 그만큼 많은 “목표”, 즉 도덕들이 존재했다. 각각의 민족이 모두 자신만의 도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 도덕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힘에의 의지일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285쪽)

도덕의 정체는 힘에의 의지였습니다. 따라서 모두 자신만의 도덕이 필요합니다.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힘의 차이를 느끼려면 내가 상대(들)보다 더 잘해야만 합니다. 타자는 시기 질투, 원망의 대상이거나,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무엇보다 나의 힘이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힘의 고양을 느끼는 것이 외부 조건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늘 비교 속에서 남에게 뒤쳐질까 두려워하거나, 남보다 뒤쳐진 나를 보며 결핍감을 느껴야 합니다. 아주 영리하게 나보다 힘이 약한 자들을 찾아다니며 사이비 고양감을 느끼는 방법도 있고요(니체가 보기에 후자의 대표주자는 기독교의 ‘사제’들이었습니다. 니체는 사제들이 자신의 힘을 느끼기 위해 약한 자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모자라 사람들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비판했죠). 전자도 후자도 허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힘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전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핍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후자는 힘이 있는 듯한 착각, 가짜 힘을 느끼고 있으므로 실제 고양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도덕이 아니기에 나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반대로 모두 자신에게 자신만의 목표를 스스로 부여하고 그 목표를 향해 자신에게 힘을 발휘해 간다면 어떨까요? 힘을 자신에게 발휘하기 때문에 외부 조건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힘의 의지라는 목표를 달성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죠. 니체는 이를 “초인”이라고 명명했는데요.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 니체가 보기에 초인은 신의 죽음과 함께 신성(가치)을 잃은 인간에게 다시 의미를 찾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유일무이한 나를 만들어가겠어!라는 의지가 불타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막막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이로운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또 니체는 “개개인에게 자신의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리고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개인적인 열쇠로서 극기와 절제의 도덕을 권하는 도덕주의자”는 초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악하다”라고 말하죠(『아침놀』 9절). 앞으로 니체를 읽으며, 니체와 함께 고민해보겠습니다.



위대한 정오 – 선데이 니체 s.1 / 『니체, 그의 삶과 철학』 / 6~11장 발제 / 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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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하늘님의 댓글

이하늘 작성일

"우리는 삶에 위협을 느끼거나, 반대로 고양되고 있다고 느낄 때 삶의 의미를 찾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요.
이것이 보라쌤 말마따나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힘을 느낄 수 있는
(혹은 느낀 것 같이 되는) 두 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이드네요.

그런데 정말 삶을 퇴폐시키는 도덕과 삶을 상승시키는 도덕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사이비 도덕도 느낌상으로는 '힘이 고양되고 있다'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발제 잘 봤습니다~

보리a님의 댓글

보리a 댓글의 댓글 작성일

하늘샘이 짚으신 포인트를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상승과 퇴폐의 도덕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정신적으로는 회의주의를 고수하며 무엇이든 의심하는 태도가 있을듯 싶네요. 지금 나에게 흐르는 힘의 고양이 착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심으로 규명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여기에 더하여 육체적인 강인함이 포함될거 같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ㅎㅎ

김성필님의 댓글

김성필 작성일

동정심을 이용하여 "나는 약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형태의 힘, 즉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주는 힘은 가지고 있다"는 작은 힘을 얻으려고 애쓰는 '인간'이란 정말 지고는 못사는 종족인것 같습니다ㅎㅎ

초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목표를 설정하며 힘을 자신에게 쏟는다는 것과, 힘은 상대를 통해야만 느낄 수 있음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니체를 읽으며, '그래 허무주의는 정말 무시무시한 것이구나! 그래서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힘에의 의지가 뭔데?' 하며 바로 내 삶에 적용 시킬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마음이 있었는데, 보라샘의 글을 통해 삶의 파괴마저 욕망하는 허무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니 이제야 힘에의 의지의 필요성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 같네요ㅎㅎ

보리a님의 댓글

보리a 댓글의 댓글 작성일

자신에게 쏟는 힘과, 상대를 통해 느끼는 힘. 제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자신'과 '상대'는 다르지 않은 같다고 볼 수도 있을거 같습니다. 자신의 타자화..라고 할까요. 자신을 타자, 즉 상대 혹은 적수로 여기는 일. 니체가 산책을 하며 혼잣말을 무수히 하고, 글을 쓰며 자신과 투쟁을 한 것이 그런 예시가 될런지도 모르겠슴다

보리a님의 댓글

보리a 작성일

와아.. 인간이 신의 자리를 대체한 순간 허무주의를 마주하게 된게 참 역설적이네요. 정상에 오르면 광활한 대지를 내려다보며 자유로움을 만끽할 거라 여겼으나, 그곳에서 마주하게 된 허무. 어쩌면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당신의 피조물이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것을 보며 지루함을 이겨냈을까요. ㅋㅋ

글 참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