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연암에게서 배우는 글짓기
이여민 (토요글쓰기학교)
2023년 토요 글쓰기 학교가 시작하였다. 『연암집』에 대한 친구들의 글 발표가 먼저 있었다. 나는 맥락이 맞지 않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인용문에 대해 질문했다. 글쓰기 학교가 처음인 친구들이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 내가 무섭다고 이야기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질문을 심하게 하는 걸까? 그러나 글쓰기 현장이 벌어지면 또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다 나도 연암의 글을 발제하게 되었다. 짧아서 고른 「自序」는 연암이 자신의 문집, 「공작관문고」에 쓴 서평이다. 이 글은 마음이 흔들린 나에게 글 짓는 이의 태도를 다시금 일러 주고 있다. 연암에게서 글짓기를 새롭게 배운다.
글의 바탕, 평상시 태도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중략)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모습을 그려내기 어려운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박지원 지음 『연암집, 중 개정판』, 신호열, 김명호 옮김, 돌베개, 2015년 개정판 2쇄, 15쪽)
연암은 글 짓는 것을 초상화 그리는 것에 비유한다. 글은 뜻을 ‘그려낸다’라는 표현이 놀랍다. 역시 연암이다! 의미를 전달하는 글을 그림에 비유하여 글 짓는 태도와 초상화 그리는 현장을 연결한다. ‘옛말을 기억하거나 억지로 경서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마다 장중하게’ 하는 사람은 참된 글을 쓸 수 없다고 연암은 말한다. 이는 화공을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는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사람’과 같은 태도란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초상을 그리는 것은 ‘억지로’ ‘일부러’ 꾸민 가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흐름 속에 있는데 ‘움직이지 않’게 하면 자연스럽지 않다. 주름 하나 없는 옷은 뭔가 있어 보이게 하는 ‘근엄한 척’과 통한다.
이 모두는 평상시의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태도이다. 연암은 초상화를 자연스럽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꾸미는 것은 가짜 모습이라고 여겼다. 글은 참을 그려야 한다.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쓴 글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평상시의 태도가 묻어난 솔직한 글이 뜻을 전달하는 힘이 크다는 뜻이다. 연암의 이런 생각은 ‘글쓰기로 수련’하는 글쓰기 학교 현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나도 책을 낼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이 부분이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2000년 전 경전인 『금강경』을 지금 내가 만나서 알게 된 만큼을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옛 불교 용어나 어려운 개념을 내가 평상시 쓰는 언어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의 조언을 수도 없이 들으며 고치고 또 고쳤다. 그래서인지 선배 의사가 내 책을 읽고 “아는 척하지 않기가 어려운데 딱 네가 아는 만큼 글을 쓴 것 같아서 책을 읽기가 편했다.”라고 했다. 매일 아침 책 읽고 글쓰기를 꾸준히 한 노력과 ‘억지로’ ‘장중하게’ 쓴 글을 따끔하게 지적해 준 튜터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이다. 그 결과인지 작년에 낸 『대중지성, 금강경과 만나다』가 얼마 전 2쇄를 찍었다.
연암은 또 말한다. 솔직한 글은 ‘말이 거창할 필요가 없고, (중략)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참을 그려야 한다.’라고. 연암은 미세한 말에서도 ‘참’을 읽어낸다. 깨어진 기와 조각에서 민생을 위하는 청의 문화를 읽어낸 것처럼 말이다. ‘부서진 기와와 벽돌’에서도 말로 도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연암의 뜻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 하찮은 것, 추악한 것, 이 모두에 도가 있으며 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연암처럼 명료하게 깨어서 관찰하는 힘이 필요하다.
연암은 글짓기에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글의 ‘뜻’, 즉 ‘참모습’을 그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평상시의 태도가 중요하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된다고 일러 준다. 세상을 향해 마음이 열려야 가능한 일이다.
칭찬과 비방, 이명과 코골이
연암은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려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린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이명과 코골이로 비유한다. 이명은 몸 밖에 소리 나는 것이 없는데도 자신만 소리가 들리는 병적인 상태이다. 즉 이명은 자기만 들린다. 글도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라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글로 타인과 소통하려면 ‘참모습’을 묘사해야 한다. 그런데 나만 들리는 이명을 “너 이 소리 좀 들어봐라.” 하면서 너도 똑같이 들어야 한다고 우기면 문제가 발생한다. 귀가 울리는 내가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쓴 글인 줄 모르고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 생각에 사로잡혀 쓴 글은 뭉친 실타래 같아서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오류에 정말 잘 빠진다. 어떤 결론을 썼는데 그 과정을 묘사하지 않으면 타인은 그 글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내가 잘 썼는데 왜 너는 알아주지 않느냐고 종종 화를 낸다. 내 귀에만 들리는 이명을 알아달라고 짜증을 내는 것이다.
또 연암은 어떤 촌사람과 동숙했다. 그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들이쉴 때마다 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내뿜을 때는 돼지처럼 씩씩대었다.’ 그래서 그를 일깨워주자 “난 그런 일이 없소.” 하였다는 것이다. 이명과 반대로 코 고는 소리는 남이 듣지만 나는 내 코 고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글쓴이가 모르는 문제점이 코골이와 같다. 코골이를 남이 듣듯이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도반들은 내 글에서 본다. 이 문제를 알려줄 때 방어하고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자기 코 고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도 싫어’하는 태도이다. 그러면 문장에서 길을 헤매고 있으면서도 고칠 수 없다.
연암은 글 짓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꼬집고 있었다. 작자가 자신만 아는 글을 쓰고 남이 칭찬하기를 바라면 이명과 같은 병적 상태이다. 병을 알아야 고치듯이 내 글이 소통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고자 하면 다른 사람이 글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연암은 친구라면 글의 부족한 점을 비판하여 밝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自序」 마지막에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공작관문고」를 보는 사람이 기와나 벽돌처럼 하찮은 것에도 마음을 쓴다면 화공이 먹물을 흘려도 도둑의 귀밑털도 살아있게 그려내는 바와 같이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러면서 연암은 내 글을 읽고 친구들이 자신의 코골이를 지적해주는 것이 글쓰기 의도와 가깝다고 끝맺는다. 마음이 흔들린 나를 반성하였다. 나만 들리는 이명과 내가 모르는 코골이를 글짓기에서 알려면 촌철살인 해 줄 도반들이 필요하다. 이런 친구들이 많은 글쓰기 학교에 있는 것이 즐겁다.
(토요 글쓰기 학교 - 1학기 / 『연암집』, 중 / 2023.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