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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레지날드 J.홀링데일이 지은 『니체 그의 삶과 철학』 세 번째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책 목차로는 12.고독부터 17.니체의 죽음까지 였습니다.
이번에 저는 니체가 명예와 인기를 갈망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건강이 안 좋은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사귀지도 않고 고독하게 글을 썼기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랬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홀링데일은 1888년이 니체가 활력 넘치는 삶을 살았던 해이자, 또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해(p.351)이라고 했습니다. 니체는 명예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계속된 좌절에 더욱더 격렬하게 그것을 갈망했다고 합니다.
저는 니체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고 있던 것일까요. 유명한 철학자여서 그를 또 하나의 신격화한 인물로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가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욕망, 충동, 고통에게 대해서는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병이 있어 많이 아파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그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피상적으로 많이 아파겠구나~정도 였으니까요. 문득 이런 태도가 형이상학적인 태도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니체라는 인물을 저 세상에 두고 바라보는 것이지요.
『선악의 저편』 36절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욕망과 정념의 세계만이 실재로서 “주어지며”, 우리는 이 충동들 이외의 다른 어떤 “실재”로도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없다고 해보자(왜냐하면 사고한다는 것은 충동들 사이의 한 관계에 불과하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기계적인(또는 “물질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데 이 주어진 세계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닌지를 묻고 실험해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까?(p.328-329)
욕망과 정념의 세계와 다른 ‘표상’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는 것 같은데요. 니체는 표상이 아니라 욕망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고한다는 것도 여러 충동들 사이의 관계라니. 사고는 정신적인 활동으로만 여긴 저에게 이 지점도 저한테는 놀라운 지점이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정신적인, 도덕적인 관념이 삶을 움직이는 것으로 여기구 있구나 싶었습니다. 니체마저도요. 니체를 내 삶에 끌고 오는 것이 아직 안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니체의 책을 읽어가니 조금은 희망을 가져 봅니다.
보라샘이 니체가 왜 도덕을 문제 삼을까라는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니체하면 도덕을 문제삼으니까 당연하다고 넘어갔었는데요. 샘의 질문으로 그게 왜 니체에게는 중요하게 여겨졌을까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니체를 통해 도덕이 우리를 사유하게 만들지 못하고 약자로 살게 하니 도덕이 문제구나 싶지만요. 니체의 이런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영원 회귀 사상을 견뎌 내는 방법들(모든 가치의 재평가), 영원 회귀와 환생에 대한 차이, 자유에 대한 부분 등, 앗, 숙현샘의 보호색에 대한 말씀도 흥미로웠습니다. 니체를 통해 알고자 하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요^^. 이제 본격적으로 니체의 책을 읽으니 우리가 가졌던 궁금한 사항들을 하나씩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