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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와 과학> 6차시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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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3-25 11:41 조회40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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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시인 이번 시간에도 또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장님이 길 찾아 가는 듯 수업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오고 간 어머어마한 이야기들이 어떠한지 감이 잘 오지 않았네요.

 

공부를 하면서 항상 지적 받았던 것이 바로 질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질문을 뾰족하게, 질문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라는 코멘트를요. 이번 시간에 가장 먼저 다루어졌던 것이 바로 질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부분과 전체앞부분에는 하이젠베르크가 갖고 있는 질문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 질문들을 엮어가고 풀어가면서 불확정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는 근영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하이젠베르크의 경우 역시 당시 경험의 세계 즉 믿음으로 굳어진 지식체계에서 새로운 질문으로써 구멍을 뚫어낸 것이었습니다. 질문이 바뀌지 않으면 다른 지점을 포착, 생산해내기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근영샘은 질문이 달라져야 앎이 달라진다고 정리해주셨습니다. 이 부분이 불교와도 관련이 있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다른 종교나 학파는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삶의 원인이 되는 것을 밝히고자 했는데 부처는 다른 것을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근본원인 즉 인과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어떤 인연조건에 있는지를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에 의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인연조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인과에 대해서는 무기,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어쩌면 제대로 된 질문을 찾는? 혹은 던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라는 경험의 세계 즉 고전역학에서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만남의 원인을 말해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다고 합니다. 즉 근원적 원인이 계열 조직을 주도하는 힘이기에 그 힘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세계에서는 만남이루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전제 조건이 달랐습니다. 어떠한 인연조건인지 그것은 불확정하다는 것이지요. 우연이나 우발이라는 것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답니다. 산소와 수소가 만나 물이 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모르다는 것이지요. 그저 둘이 만났더니 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의 인연조건이 딱 만나 물이 되었다는 것 뿐! 만족할 만한 곳에서 멈춘다. 그 지점이 바로 원인이라면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 불교와 맥이 닿는 부분이라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맞이했을 때 어떤 사건 사고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병이라면 나는 왜 병에 걸렸는가? 혹은 지나가다가 돌에 맞으면 나는 왜 돌에 맞았지? 등 그 원인을 추적하고 그 대상이나 원인을 밝혀 해결해 고통을 줄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율에 의한 마음은 바로 책임이라는 것과 처벌 고통이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 니체는 어떤 마음이 인과율을 움직이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니체는 인과율은 타인에 대한 처벌 고통을 즐기는 마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의의 심판 뒤에 숨은 추악함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사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으라는 것이지요. 처벌에 따르는 고통을 즐기는 추악한 마음이 바로 인과율을 움직이는 마음이라니! 불확정성의 원리로 사건사고를 본다면 사건사고는 그 장소에서 인연의 조건으로 딱 맞아 떨어진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우리는 그 사건사고를 오롯이 인연의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왠지 손해보는 것 같고 내 상처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벌어진 것 같고 그래서 억울하거나 참을 수 없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즈음 문샘이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엄청난 살인마가 부처님 앞에서 칼을 놓은 순간 모든 업식이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그런 것이 어떤 것일까? 도대체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도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염주라고 합니다. 앙굴리말라와 스승은 스승의 부인이 꾸민 모함에 빠지게 됩니다. 스승은 부인의 말만 믿고 제자였던 앙굴리말라에게 백 명의 사람을 죽이면 최고의 범천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100명을 채울 마지막 살인 앞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에게 수행자여, 그대는 가면서 나는 멈추었다고고 말하고 멈춘 나에게 그대는 멈추어라라고 말한다. 수행자여 나는 그대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 어찌하여 그대는 멈추었고 나는 멈추지 않았는가?” 부처님이 대답하시길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살아있는 존재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체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앙굴리말라가 부처님 앞에 칼을 내려놓고 부처님께 무릎 꿇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였습니다. 인연의 조건을 바꾼다는 말인가? 인연의 조건을 전환시킬 수 있다는, 멈출 수 있다는 경우의 일화인가? 앙굴리말라가 죽인 그 백 여명의 생명과 분노 절망 슬픔의 업식을 멈춘다고? 모든 업식의 시작과 끝은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인가? 내가 살아온 방식과 경험의 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내내 이 이야기와 씨름하는 수 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또 어쩌면 앞으로 어떤 불확정한 만남에서 불현듯 깨닫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순간이 어쩌면 현재라는 찰나인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장님처럼 만져지는 부분부분에서  이렇게 모양과 형태를 제 식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를 담아 후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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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지혜님의 댓글

김지혜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질문이 달라져야 앎이 바뀐다에서 일차로 크으~~
어떤 "마음"이 인과율을 움직이는가? 라는 질문에서 또 크으~~
부처님이 인과가 아니라 인연조건, 어떤 작동원리가 있었는지를 물었다는 말에서 과학매니아이신 정화스님이 생각나네요
정화스님이 독특하시다고 생각했는데 부처님의 질문과 사유들이 과학과 닿을수밖에 없었구나하고 끄덕이게 됩니다
인연조건을 생각하는 마음과 믿음에 구멍을 내는 질문에 대해서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