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안녕하세요, 수정입니다.
저는 이번 <사랑과 다른 악마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가 만든 장치들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로요^^;
이 책의 주인공은 ‘마리아’라는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로, 엄마 아빠가 방치해서 흑인 노예들과 섞여 자란 귀족의 딸입니다. 겉모습은 백인이지만 영혼은 흑인과 마찬가지죠. 이야기는 이 아이가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리면서 시작됩니다. 광견병의 증상이 없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그 때부터 이 아이의 정상적이지 않은, 즉 흑인스러운 행동을 병에서 비롯된 광기나 악마의 빙의로 해석하고 계속 구석으로 몰아쳐갑니다. 그런 그녀에게 엑소시즘 의식을 거행하려는 신부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녀와 만나는 순간, 우르릉 쾅! 그 신부의 운명은 뒤바뀌어 버립니다.
책 전체의 분위기는 어딘가 신비스럽고, 우중충하기도 하고, 괴기스러운 느낌도 납니다.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오르간 소리처럼, 교회의 딱딱하고 경건한 느낌과 동시에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여지를 계속 품고 있습니다. 분명 이 소설은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말이죠.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딱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었지만 중간중간 인상 깊었던 것, 정리해보고 싶었던 것을 적어보려 합니다.
1. 소설을 파악하는 방법
- 모든 인물의 공통점은?
- 주인공은 누구인가?
1) 누가 많이 나오는가?
2) 중요 사건에 연루 되었는가?
- 시간을 어떻게 쓰나? 속도는 어떻게 되나?
- 가장 중요한 공간은?
선민샘께서는 이런 여러 가지 형식 요소 속에서 ‘사랑이란 게 뭔가’(즉 작가가 다루려는 중심 개념이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소설 속에서 기호들이 곳곳에 자리하는데 그들은 멀리서 서로 공명하면서 말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며 소설 전체의 톤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말로 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란 건, 앞 뒤 아귀가 딱 맞는 논리를 넘어선, 장면들의 다양한 중첩과 모순 속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사랑에 대하여
신의 사제인 델라루오 신부는 마리아를 사랑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병처럼 전염되며, ‘기존의 나’를 산산이 부서지게 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부정에 이르게 하고 신부는 고통 받습니다. 그 부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상식을 버려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도 그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사랑은 파괴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동시에 넘어야 하는 한계도 분명해보입니다. 하지만 마르케스가 사랑이 파괴나 죽음에서 끝난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마리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부글부글 자라나는 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머리카락은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사랑과 생명력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완벽한 자기 탈피를 경험할 때, 기존의 자신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런 파괴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힘으로 삼고 있는 사랑은 다시 자라난다는 것일까요?
3. 마리아의 부모님에 대하여
이 소설의 맨 처음에는 마리아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물어보셨습니다. 이 장면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나오게 되었냐고요. 그래서 이 부분을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둘은 엄청난 증오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던 결혼이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왜 그렇게까지 증오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둘은 각자 사랑했던 사람을 ‘상실’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신이라는 거대한 질서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보상 받는다’와 같은 단순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과의 질서 말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런 인과를 무너뜨리고 막무가내로 일상에 침입해 소중한 것을 빼앗습니다. 사실 너희들이 바라던 질서 같은 건 없었어!라는 선언으로 인해, 그 둘은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허무함 속에 빠져버립니다. 지금 열심히 살아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내일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거죠. 후작은 첫 번째 부인의 죽음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의 유령 같은 모습을 소름끼칠 정도로싫어한 것, 좋아하던 남자가 죽자 카카오 중독에 빠져버린 것이 죽음을 경험한 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질서와 상식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무질서와 죽음에 대한 증오가, 신과 악마, 백인과 흑인의 대비로 보여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그 둘 사이에 다리를 잇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아름답거나 조화로운 신의 모습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무질서, 파괴의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것이 색달랐습니다.
선민샘이 말씀하신대로 사랑이 무엇이다 딱 정의 내리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이런저런 결들을 느껴보는 것. 그 단어를 감싸고 있는 세계(정서라고도 할수 있을까요?)가 풍부해지는 것을 조금씩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이렇게 보내기는 아쉬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른 분들도 이 소설을 읽고 같이 이야기 나눠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