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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테일] 마지막주 후기! <페스트>

게시물 정보

작성자 이달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3-22 06:37 조회78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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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달팽입니다! 

세미나는 끝난지 2주가 지났는데, 늦고 늦은 후기를 올립니다ㅜㅜ (나올 뻔한 변명은 각설하고!)

지지난주, 총 두 시즌 16주 동안 진행되었던 문테일 세미나가 끝났습니다. 

문테일 없이 2주를 살아보았는데 여기 옆구리 한 쪽이 허전~ 한 듯 합니다. 

선민샘께서 세미나하면서 좋았던 작가의 다른 책들도 올 한 해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토니 모리슨의 <재즈>를 한 권 사서 책장에 꽂아두었습니다(네 아직 못 펴봤어요..ㅎ).

다른 샘들은 어떤 작가를 고르셨을지 궁금하네요:).


마지막 주 텍스트는 카뮈의 <페스트>였습니다. <빌러비드>에 이어 400쪽에 달하는 페이지 수에 과제 제출 수는 반토막이 났는데요. 그래도 멋진 텍스트의 힘으로 세미나는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못 오신 샘들도 단톡방에 인사를 남겨주셔서 훈훈하게 다음 문학 세미나를 기약했어요^^)


역시 이 날 세미나에서도, 제가 도저히 읽지 못한 많은 부분들을 선생님이 밝혀주셨는데요. 그 많은 부분들 중에 제 마음에 콱 박혀서 맴돌고 있는 말 하나를 꼽아보자면 ‘점점 웃지도 울지도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페스트>는 ‘오랑’이라는 작고 ‘평범한’ 마을에 페스트가 돌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이름을 가지고 나오며, 또 주인공 한 명을 고르기 어렵게 여러 인물들이 비슷한 비중으로 주요하게 등장합니다. 선생님은 ‘횡적’으로 여러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고 표현하셨어요. 횡적으로는 페스트가 도는 오랑에서 자발적으로 ‘보건대’를 자처하고 있는 네 인물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끌고 가는 기록자 의사 리유, 가장 강렬한 말들로 등장하는 타루,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해지는 그랑, 또 가장 마음을 크게 뒤집은 랑베르가 있습니다. ‘종적’으로는 보건대를 가운데 두고, ‘자기밖에 모르는 코타르’와 ‘신밖에 모르는 신부님’이 한 명 나옵니다.


이들의 특징은 다 남자라는 것. 먼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주요하게 나올 수 있는 여자 분들은 다 마을 밖으로 기차 태워서 내보냈습니다. 연애 관계를 의도적으로 빼버렸다는 느낌이 들지요. 두 번째로 육친 관계도 뜯어내버립니다. 리유와 리유의 어머니(모자관계)가 나오는데, 리유의 어머니는 페스트와 싸우고 있는 리유를 ‘내 자식’으로서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보건대의 어머니 같은 느낌으로 나오시지요. 또, 부자관계로 나오는 두 인물은 페스트에 걸리게 하고, 그 중 아들만 처참하게 죽여놓습니다. 아버지로 나온 인물은 격리시설에서 풀려난 뒤,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다시 격리시설로 들어갑니다.


<페스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연애관계와 육친관계에서 일어나는 사랑, 정념적이고 서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사랑을 그리지 않습니다. 보건대 사람들은 그런 ‘사랑’ 없이 페스트라는 죽음에 맞서고 있습니다. ‘사랑’도 없지만 그들에게는 ‘신’도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죄 없는 아이가 죽어야 하는지 대답해줄 수 있는 신은 없습니다. 신은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보건대는 자기 존재의 이유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연인에게) 증명 받지 못한 채 죽음 앞에 섭니다. 이들은 개성도 없고 의미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선민샘은 카뮈의 다른 작품, <이방인>(1942년)과 <페스트>(1947년)를 비교해주셨습니다. <이방인>에서 카뮈는 한 인간을 단독자로 보기를 이야기했습니다. 때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정서가 만연했던 시대로, 카뮈는 사회의 도덕과 시스템을 믿지 않고, 그것으로 한 인간을 설명하거나 재단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로 충분하다, 어떤 것들로 나를 설명하거나 이해(곧 판단)하려고 하지 말아라. 상대 또한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런데 정오 해변에서 한 단독자와 단독자로 만난 주인공 뫼르소와 한 남자는 서로 살의를 느끼고, 뫼르소는 상대를 쏘아 죽였습니다.


<페스트>는 그로부터 5년 후 발표된 작품입니다. <이방인>에서와 다르게 <페스트>에서는 사람들의 ‘개성’을 빼놓고, 단독자 대신 ‘보건대’라는 연대의 형태로 등장인물들을 그려놓습니다. 또 타루에게는, 뫼르소가 거부하던 ‘이해’를 삶의 과제로 부여해놓았습니다. 카뮈는 모두에게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두 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연대하는 사람들을 그립니다. ‘자유’를 포기하고 자기 위치에서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이들을 그립니다.


왜? ‘페스트’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상투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페스트가 퍼지는 도시 ‘오랑’을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상투적인 도시로 그리기 때문입니다. 다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살고 있을 때 퍼지는 것이 바로 페스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페스트처럼 전염성이 강합니다). 죽음과 상투성을 묘하게 겹쳐놓은 카뮈의 시선이 흥미롭습니다. 둘을 왜 같이 두었을까? 습관적인 삶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인 앎, 즉 성실하지 않고 게으른 인식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판사인 타루의 아버지처럼 죄책감 없이, 자기 옳음으로,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습니다.


보건대 사람들은 페스트 앞에서,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지?를 질문합니다. 어떤 문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를 보면서 가는 것. 그것이 성실함입니다. 그러려면 ‘내’ 욕망을 계속 의심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일들에 위계를 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실함의 맥락에는 개성이 아니라 좌표가, 위계가 아니라 ‘적합’함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현형이 조명한 페스트 시대에도 살아남을 인물 ‘그랑’이야말로 위계 없이 할 일을 하는 적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형용사를 수없이 바꿔가며 한 문장의 글을 쓰고, 리유가 진료하는 곳에 와서 통계를 내는 일을 합니다. 이 일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웃지도 울지도 않음’이 나옵니다.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를 적다보니 길어졌네요.ㅎㅎ) 페스트 앞에서, 누구나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내 욕망을 의심하고 내 위치를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서는, ‘내’가 슬프고 기쁜 것이 점점 사라집니다. 건조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신 더 진지하고 성실합니다. 선민샘이 말씀해주신대로 <페스트>가 대단한 작품이라고 느껴집니다. 크고요.


저는 이 ‘웃지도 울지도 않음’이 선민샘께서 마지막에 다영언니의 16주 문테일 소감에 답해주신 것과 연결되었습니다. 다영언니는 갈수록 글을 쓸 때 ‘인상 깊은 장면’이 찾기 어려웠다고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그게 ‘내’가 인상 깊은 것이 사라져가는 과정이라고 해주셨어요. ‘내가 인상 깊은 것’은 원래 내가 알던 것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게 없어지면 모든 게 ‘인상’이 아니라 ‘생각 거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생각 거리로, 생각해볼만한 것으로, 문제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모든 것에서 위계를 벗겨놓는 것이고, 내가 기쁘고 슬픈 것을 내려놓는 것이겠지요. 가고 싶고, 내고 싶은 길입니다.



문테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저의 고민은 문학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였습니다. 16주가 지난 지금,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아니지만, 선민샘의 안내를 따라 어떻게 읽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생긴 것 같습니다. 선민샘께서 가르쳐주신 문학 독법을 정리해보면서 후기를 마쳐보려 합니다.


1. 즉각적인 인상이나 감정만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에서 펼치고 있는 논리를 읽어내면 좋겠습니다. 소설가들도 개념을 쓰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 저런 것. 작가의 논리, 문제의식을 찾아내야, 작품을 내 시선으로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책을 읽을 때 그렇지요.


2. 소설가들은 한 단어를 다 다르게 씁니다. 특히 문학에서는 그 단어의 의미와 함께 뉘앙스, 온도까지 감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문테일 두 번째 시즌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책을 읽었는데요.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읽었던 책들의 다 다른 분위기와 느낌들이 떠오릅니다. 하나의 인상, ‘내’ 인상만 가지고 있던 언어에 풍부하고 이질적인 느낌들을 집어넣게 된 것 같습니다. 하나의 말에도 수많은 길이 있고, 하나의 옳음과 정의가 없음을 느낍니다. 대신 매번 이 다채로운 느낌들을 내 언어로 새롭게 매듭을 지으면서 가게 되겠지요!


3. 예술은 질문을 던져주는데, 그 질문은 작품의 ‘형식’에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배치, 공간의 배치, 시간이 흐르는 방식 등등 형식을 뜯어보다보면 과제(풀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왜 이렇게 썼을까?라는 질문을 모든 곳에서 던지면서, 페이지를 못 넘길 수 있습니다.^^


4. 결국 내가 어떤 생각을 했냐가 중요합니다. (역시, 또, 그렇습니다!)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결국 내가 어디까지 생각을 밀고 갔느냐가 핵심입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도 역시, 안 해본 생각을 해보고, 안 느껴본 것을 느껴보고, 안 해본 말을 해보는 것!


16주 동안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글 쓰는 법, 글 피드백하는 법, 질문 하는 법, (아직 특히 터득이 안 되는...) 시간 늘여 쓰는 법... 공부와 사람과 질문을 대하는 태도.. 등등 제 자리에서 침착하고 성실하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16주 동안, 혹은 8주 동안 함께 읽고 썼던 모든 샘들, 누구보다 재밌게 공부해주신(ㅎㅎ) 선민샘 (늦은) 감사드립니다! 모두 다음 공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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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샘님의 댓글

조은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문테일~~ 저도 허전한 것인지 계속 예전 작품들이 종종 떠오르곤 했어요. 점점 웃지도 울지도 않게 된다는 말은 자신의 위치와 적합함 그리고 성실함을 찾는 일이군요! 책을 읽고 정리할 때의 작업도 그런 일들 중 하나의 예시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치우치는 게 아니라 작가의 논리를 찾아내고 안 해본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요! 작가의 논리 안에서 내 생각의 위치를 알아보는 과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읽으면서 들었습니당. 마지막 선민쌤의 꿀팁 정리 감사합니다 ㅎㅎ 종종 들려서 보고 가야겠다는...!

서주희님의 댓글

서주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떤 문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를 보면서 가는 것이 성실함"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맴도는 것 같아요. 문테일이 끝난지 2주가 지났음에도 페스트 속 인물들이 자꾸 생각이 나네요~ 문테일 덕분에 정말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윤하는 토니 모리슨 작품이 좋았나 보군요! <재즈>는 <빌러비드>와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네요ㅎㅎ 저도 카뮈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아야 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