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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세미나 시즌2 !! 무려 레비스트로스 선생님의 <신화학>을 다 읽고 시즌 1을 넘어와, 시즌 2가 지난 금요일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시즌 함께 했던 보라보라샘, 미리내 금란샘, 다래샘, 영희샘(내일부터 못오시지만ㅠㅠ), 은주샘이 오셨구요, 인류학 세미나에서 영입된 어인정 유진샘, 즌샘, 그리고 무려 시애틀에서 와주신 가은샘, 돌아온 (곧 새 신부!) 은경샘까지 ! 또 새로운 샘들과 신화 공부를 꾸리게 되어 신이 납니다.
시즌 2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어갈 것인데, 그 전에! 월터 옹 선생님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읽습니다. 신화 세미나의 학습목표(?^^)는 인류학자-되기입니다. 다른 곳의 신화를 읽으며 사람들의 삶과 터전을 감각적으로 느껴가고, 또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사람’이 이런 것도 하고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를 생각하고 써가는 공부를 해가면 좋겠다고 선민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인류학세미나에서 선민샘께서 화장실에 휴지와 수건과 치약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배열을 했는지를 보면, 그 집 사람의 정신의 구조를 이해해볼 수 있다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인류학자에게는 모든 것이 실전이고, 또 연습문제입니다!
여튼, 옹 선생님의 <구술문자와 문자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개념을 잘 이해하는 것이겠죠. 다래샘께서도, 선민샘께서도 말씀해주신 것처럼 저자가 쓰고 있는 개념의 맥락을 잘 타지 않으면 비슷한 얘기만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첫 시간의 키워드는 제국주의, 복수성, 라임 맞추기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씩 나눈 이야기와 생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국주의
언어의 가장 기본적 형태는 ‘말’입니다. 세계에는 많은 언어(몇 천 가지)가 있(었)는데, 이중 ‘문자화’된 언어는 106가지에 불과합니다. 현재 문학을 하는 언어는 78가지라고 합니다. 한 번도 ‘문학’을 가진 언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78가지라고 하니까 생경합니다. 소설, 시, 등등 이런 글쓰기 방식이 보편적인 소통방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시대적으로도 문학이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어보긴 했습니다만...)
문자화된 언어는 다시 구술문화 때의 언어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문자의 힘은 엄청 강력해서, 인간의 신체에 그 문자성이 각인되며, 사고방식과 정신의 구조를 바꾸어놓아 문자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옹 선생님은 ‘선풍기’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선풍기’라는 글자, 철자 없이 정말 선풍기의 이미지만 상상할 수 있냐고요.
이렇게 문자문화와 구술문화 사이에는 돌아올 수는 없고, 건너갈 때에도 꽤나 큰 압력이 필요한 심연이 있습니다. 구술 언어만 쓰던 사람들이 문자를 쓸 때에는 고통이 수반되고요. 옹 선생님은 “쓰기는 독점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활동”(43)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어원과 같은 역사적인 연결에 의지할 것도 없이 다른 것을 동화시키고 흡수해버리는 경향이 있다.”(43)인데, 뒤에 더 설명을 해주신다고 하셨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글을 쓰는 사람은 사물화된 삶을 욕망하고, 지배자가 되기를 욕망하게 되고, 제국주의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문자화된 정신은 이전과 다른 것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동화하고 흡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상상,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이 좋다는 감각이 있다는 것이겠죠. 그 상상/ 토대는 문자가 살아있는 것을 ‘고정’시키고 ‘정지’, ‘사물화’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문자는 사물을 지시하고, 그 사물을 실체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여러 가지 살아있는 현실을 문자라는 고정된 표면에 흡수하고, 동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선풍기는 선풍기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문자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완전한 사물화가 가능한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하나의 문자 역시 다른 문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되지 않는가...? 이것은 두 번째 키워드로 넘어가며 조금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2) 복수성
두 번째 키워드는 복수성입니다. 무엇이 복수냐, 언어를 쓰는 주체가 복수입니다. 구술문화에서는요. 문자문화는 단수적인 언어 주체를 갖습니다. 물론 자세히, 천천히 생각하다보면 ‘나’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로 고정되어있냐,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지만, 보통 때 우리의 사고방식은 이러합니다. ‘이거 누가 했어?’ 책임을 묻고요, ‘너 왜 그랬어?’ 주체의 의도에 사건을 귀속시킵니다. 예시가 비근하네요. 어쨌든 이런 생각이 문자성이라는 것이죠.
언어가 가시화되어있고, 물질화되어있으니, 이것을 생산한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쓴이의 독창성이라든지, 언어의 신선함이라든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문자문화 사람들에게는 ‘천재 시인’이라고 일컬어졌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관용 구문들의 짜깁기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에 심적 저항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문자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말하는 자기를 복수적으로 느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죠. 아니 오히려 말할 때마다 복수의 언어, 오랜 시간 되풀이되고 있는 언어에 접속하고 있다는 감각일 것 같습니다. 언어가 먼저 있고, 그것을 지금 현실화시키는 주체가 있는 것이죠. 그 언어의 주체는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들, 그리고 그 언어를 되풀이해온 많은 사람들, 이렇게 복수이겠습니다.
언어 주체의 복수성에 대해서는 ‘신화 세미나를 들은’ 보라샘이 과제 정리를 무척 멋지게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체는 ‘신화 세미나를 들은 보라샘’입니다. 저 신화 세미나에 저희 세미나원들과 옹 선생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여튼 ‘신화 세미나를 들은 보라샘’의 과제문 링크를 남기고 제가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며 2번 키워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http://kungfus.net/bbs/board.php?bo_table=0301&wr_id=1602&sca=숙제방
구술 문화에서의 정형구, 이야기 덩어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말입니다. 따라서 구술하는 ‘나’는 단독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자로서 말합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전해온 우리로서 말하는 것이죠.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정해진 정형구로 이야기하지만 그때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구술하는 자는 자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정형구들을 조합하지만, 운율이라든지, 듣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들을 선택합니다. 정형구의 조합 또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혼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즉 구술의 세계에서는 여럿이서 여럿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상황이 끝남과 동시에 이야기도 사라집니다. 이렇게 “해묵은 관용 표현”들은 매순간 다르게 조합되고 사라집니다.
반면 문자는 단독적이고 단독자로서 ‘나’의 말을 모두가 똑같이 하도록 강요하죠. 우리가 쓰기를 한다는 것은 “그 말을 억지로 시각적인 장(場) 안에 영구히 고정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변하고 있는 연속적인 흐름에서 한 순간, 한 지점을 절단하여 시각화(문자화)하고 사물화하는 것이죠. 그리고 해독자는 “단어에 관해서 생각해보라”고 요구받죠. 그래서 우리는 문자로 쓰여진 무언가를 보면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그 ‘문자 안’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그 문자가 가리키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저자가 그 내용에 무엇을 담았는지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을 공간에 고정시키면 우리는 그 말이 지시하는 걸 사물처럼 느끼게 됩니다. 물론 고쳐 쓸 수는 있습니다만, 고쳐지기 전까지 언어는 혹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고정된 사물이 됩니다.
이를 제국주의와 연결해 조금만 덧붙이자면, 문자문화에서는 주체가 단수적이기 때문에 단수-저자의 생각이 옳은 해석으로 기능할 수 있고, 그렇기에 문자를 통해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 전달 가능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배’가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해석되어야 할 메시지를 쥐고 있는 자와, 그것을 해석해내야/정해진 방식으로 들어야 하는 자로 위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반면 구술문화에서는 언어의 주체도 복수적인데, 듣는 자도 그 주체에 들어가기 때문에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정확히 분절할 수 없을뿐더러 위계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3) 라임 맞추기
옹 선생님 책에 문제적 구절이 하나 있었죠. “호메로스가 포도주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형용구는 운율적으로 모두 달라서 그중 무엇을 사용할지는 그 구의 의미보다도 오히려 그 구가 놓인 절의 운율적 필요에 따라 결정되었다.”(56) 이 구절입니다. 의미보다 운율에 따라 형용구를 정했다고? 자 의문이 드시죠, 그것은 우리가 문자문화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달할 메시지가 있고,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언어를 골라서 말한다/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술문화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문자문화에서 쓰는 단어의 개수보다 현저히 적다고 합니다. 구술문화에서는 2천~3천 개의 어휘가 있다면, 문자문화에서는 150만여 개의 어휘가 있다고. 어마어마한 차이네요. 단어의 수는 공동체의 인구가 많을수록, 공동체의 제국주의성이 짙을수록 많아진다고 합니다. 구술문화에서 의사소통하는 방식이 어휘 자체에 한정되어있지 않고, 음성과 음량, 몸짓에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언어의 사용 의도를 헷갈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데에 어휘수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왜 말을 할까요?(물론 다른 동물들도 말을 합니다만) 인간이 말을 발달시키게 된 것은 털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다른 유인원들처럼) 털 고르기를 하며 자기와 가까운 자와 먼 자를 구별하고, 내 편과 아닌 편을 구분하고, 정서를 나눠야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자 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저희가 인류학 세미나에서 이전에 읽었던 <마음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크기가 커지자 털 고르기를 해줘야 하는 개체수가 너무 많아져, 먹고 사는 것과 털 고르기를 동시에 다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부족해 언어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언어는 무엇을 ‘전달’하는 목적 이전에, 관계를 구획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구술문화에서 언어는 그 속성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운율을 맞춘다는 것은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끼리 공동의 리듬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시대 라임을 가장 열심히 맞추고 있는 이들은 역시 래퍼들과 작사가들(그리고 문릿샘^^)인 것 같은데, 잘 짜인 가사를 들으면 즐거워지는 것도 같은 언어감각을 즐길 수 있다는 구술적 주체의 소속감이 발현되는 것일까요?^^ 각종 지역별 억양, 정서가 드러나는 방언들도 떠오릅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서 표준어밖에 못해서, 억양만 듣고 충청도인지 경상도인지 등등을 알아듣는 친구들이 신기했습니다. 시대가 지나며 점점 각종 억양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우리의 언어가 제국주의적이 되어가는 것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나의 국가 아래 모두가 같은 리듬의 언어를 써야한다는 압력이 밀려오는 것이니까요.
후기가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선민샘께서 던져주신, 남은 문제는 이렇습니다. 구술문화에서 되풀이되어 전달되어 온 그 이야기, 인간이 바로 그 이야기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왜 하필 그 이야기어야 했는가, 이런 풍경속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는가를 질문해가는 것.
내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