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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 세미나 s2] 3주차 후기 -문자문화의 폭력성, 타자 없는 폐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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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리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03 02:53 조회16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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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문화와 문자문화』 4,5장 / 2022.06.30 후기 / 미리내


문자문화의 폭력성, 타자 없는 폐쇄성


구술문화는 말하는 나와 듣는 타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타자성으로 인해 구술문화는 진실된 말하기를 바탕으로 공감적이며, 참여적인 성격을 지니고 기술로써 논쟁을 할 수 있다. 논쟁은 다른 말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때론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수단이 되는 어머니에 대한 욕은 언어적 비난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이며 휘발성을 갖는다. 월터 j,옹은 구술성의 폭력성이 시각적으로 제시될 때 보다 덜 혐오스럽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청각적인 구술의 욕에 더 깊이 반응하고 불쾌해 할까? (3장의 논점이 계속 이어지면서 이야기 되었다)

청각은 통합하는 감각으로 말하는 소리 뿐 아니라 듣는 소리도 온몸을 통해 울리고 들린다. 표면적이고 외부 지각적인 시각과 달리 청각은 오랜 여운을 가질 수 있다. 구술문화가 갖는 휘발성의 차원에서 보면 청각의 여운은 휘발되지 않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쩌면 우리가 쓰기문화에 익숙해져 듣는 것도 읽는 것의 차원에서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문자문화의 폭력성이 더 혐오스러운지 이야기 나눴다. 듣는 것의 보조적 위치에 있었던 쓰기는 말을 시각 공간에 재구성하였다. 쓰기가 된 말은 관념화되었다. 쓰기의 틀 안에 들어간 관념은 정확성을 가지기 위해 쓰기의 주체의 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쓰기를 비인간적이며 하나의 사물이며 만들어낸 제품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쓰기의 인공성은 창조적이며 인간의 내적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시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기술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쓰기에서 발전된 인쇄는 인간의 내면의식과 무의식적인 자원을 점점 사물화, 비인격화시켜 폐쇄 감각을 부추켰으며, 말의 사적 소유라는 근대적 지적 재산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문자문화가 가진 사물화, 비인격화, 사적 소유는 직접적인 타자가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일방적인 전달방식을 취한다. 구술문화가 가진 공감적이고 참여적인 개방성은 소통을 위한 기술적인 폭력성(논쟁,)을 가진 반면 문자문화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폐쇄성은 불통의 폭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쓰기의 폭력성은 고독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유진) 타자 없는 말하기는 관념의 틀 안에 자신의 생각을 밀어 넣어 구현하고 영원성을 가진 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수정과 수정을 거듭해야 한다. 사전을 참조하고, 권위 있는 전문가의 의견을 찾는다. 이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쓰기는 타자 없는 고독한 내면화로 구술의 진실성을 퇴색시켰다.


문자문화의 내면화와 타자 없는 폐쇄성을 가진 쓰기의 예로 일기를 들 수 있다. 일기는 자의식이 가장 발달된 쓰기의 형태로 공공의 주제보다 사적 주제, 취미, 자기감정에 충실하다. 일기는 나에게 말을 거는 모방적인 대화이다. 일기가 한때 가장 내밀화된 비공개 쓰기의 영역이었다면 요즘 일기는 sns를 통한 기록과 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와 말을 합체시켜 나를 보여주고 싶은 타자를 대상으로(나 같은 타자) 쓰고 있다. 이런 sns의 사적 쓰기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특징이 있다. 좋은 모습으로만 보여지는 나는 통제적인 쓰기의 희생양이 된다. 자신의 우주적 존재 의식을 버리고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소유로서의 자기를 만드는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그래서 문자문화의 폭력성이 더 혐오스럽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은밀하게 스며들어 치유 불가능한 타자 없는 폐쇄성을 갖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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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달팽님의 댓글

이달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샘 후기를 읽고 지난주 마지막 챕터를 다시 읽다가 든 생각인데요. 요즘의 sns는 마치 2차 문자성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구술성이 쓰기를 바탕으로 통제된 말하기를 보여준다면, 이것을 다시 문자적으로 가두는 것이 sns적 일기 쓰기인 것이죠. 이를테면 옹 선생님이 설명하고 계신 문자성은 고립된 상태라 많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텍스트를 통해 자기와의 (일종의?) 진실한 소통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sns의 일기는 마치 ‘전자 미디어’ 속의 연설처럼 방송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차 구술성을 보여주는 전자 미디어는 1차 구술성의 특징 중 하나(저희 세미나가 제일 좋아하는 특징^^)인 논쟁성을 완전히 빼내 깔끔하고 완결적인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샘 말씀대로 문자문화의 폭력성은 폐쇄성 자체인 것 같습니다. 그 장의 변형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샘 말씀대로 치유할 타자가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논쟁 자체를 막아버렸는데, 그 막음 자체가 그 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제하는 폭력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드는 질문인데, 필연적으로 타자에게 말을 거는 글쓰기인 편지쓰기 같은 것은 상호텍스트성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그것 역시 고독한 글쓰기일까요? 어떻게 타자의 논쟁적 구술에 열려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또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2차 구술성에 포획되지 않고!)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신 후기 감사합니다, 금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