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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 s2-4 / 『구술문화와 문자문화』(4) /문자문화에서의 구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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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인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08 06:39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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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정리> 


구술문화에서의 내러티브

월터 J. 옹은 ‘인간의 지식은 시간으로부터 나온다’(222p)고 한다. 때문에 이 지식을 전승하기 위해 구술문화는 ‘내러티브’를 사용한다. 내러티브는 간단히 말해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줄거리, 즉 이야기를 말한다. 구술문화는 서사시라는 내러티브를 통해 대량의 기억들을 영구히하기 위한 전승을 해왔다. 그런데 이 방식이 문자문화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굉장히 독특하게 느껴질 것이다. 

우선 구술문화인들은 전통을 전승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전통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발화자와 청자 간의 상황 속에서 즉흥적으로 단어를 사용하고, 이야기의 배치를 바꾸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청자를 서로가 의사소통하는 상황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전통을 중시한다면서 왜 전통은 뒷전이 되는가? 사실 구술문화인들에게 기억과 전통은 외부에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가수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여 효과를 거두지 않고, 자신을 포함한 청자들을 위하여 전통적 사고를 관습적으로 실현화함으로써 효과를 거둔다”(229p/1975, pp. 172~79) 그들이 기억을 전승하는 방식은 ‘실현화’를 통해서이다. 즉 단순히 기억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기억이 ‘일체화’(91p)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의도적으로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일체화된 기억을 실현함으로써 청자에게 전통적 사고의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구술문화에서 서사시는 삽화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하나의 구체적인 연결성을 가지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삽화를 긁어모아 놓은 것’(228p)처럼 산발적이고, 시간적으로 불연속적이다. 이들은 말을 하는 도중에 상황에 알맞게 삽화를 꺼내 쓴다. 때문에 구술문화에서 내러티브는 늘 새롭다. 이들에게 전통은 그대로 답습되는 것이라기보다 그때그때 만들어가는 것이다. 


문자문화에서의 내러티브

문자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는 구술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표현한다. 이들 문화의 내러티브는 매우 순차적이며, 기억 자체를 반복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이는 기억을 공간에 고정하는 문자의 특성 때문이다. 문자가 이야기를 고정시키면서,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비교하여 순서에 맞게 배치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문자를 통해 전통을 굳이 일체화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굳이 자신에게 새기지 않더라도 기억은 문자 안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내러티브는 문자 속에 감금된다. 때문에 구술문화에서 내러티브는 청자와 상황을 공유하면서 발전(?)이되었다면, 문자문화의 내러티브는 자체적으로 내용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문자문화의 내러티브는 줄거리를 시간 순으로 배치시켜 각 사건의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시키고는 단단한 클라이맥스 구조를 사용한다.

클라이맥스 구조가 굳어진 것은 인쇄문화에 들어서서인데, 인쇄문화에서 이야기가 가장 매끄럽게 진행되는 지금의 소설이 탄생한다. 소설은 인물의 내면화를 강조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내적 고뇌에 차있다. 이것은 문자가 내용을 고정시키면서 내용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술문화에서는 문자문화의 인물처럼 고뇌하고 변화하는 입체적인 인물이 등장할 수 없다. 구술문화는 발화자와 청자를 위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때문에 기억하기 쉽고 줄거리가 시간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더라도 이해하기 쉬운 평면적인 인물을 등장시킨다.


문자문화에서의 구술성


언뜻 보기에는 문자성보다는 구술성을 추구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문자성은 작가와 독자를 허구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문자문화에서 화자와 독자는 동일한 상황을 공유할 수 없다. 다만 같은 내용을 통해서 각자의 상황을 만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황을 공유할 수 없는데 이것이 정말 의사소통이며 함께하고 있는 것인가? 문자문화에서 우리는 개인 속으로 폐쇄되며, 고립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월터 J. 옹은 문자문화에서 벗어나 구술문화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쓰기의 기술을 안 이상 우리는 결코 순수한 구술성, 즉 일차적 구술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문자는 단순히 물질적 도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정신에도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옹이 구술문화로의 회귀를 주장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불가능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문자문화와 구술문화 중 무엇이 더 낫고 말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문자성으로 인해 우리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탄생시켰다. ‘문자성은 쓰기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많은 가능성을 말과 인간 생활에 가져다주었다’(270p) 그렇다고 문자성의 사고가 구술성의 사고보다 월등한 것은 아니다. ‘구술성은 이를테면 『오디세이』처럼 문자를 터득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작품을 낳을 수 있다’(270p) 이것은 문자성과 구술성 중 어느 것이 더 이상적이고 더 우월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문자문화로 들어섰지만, 구술성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두 가지의 훌륭한 음식이 있는데 왜 굳이 하나의 음식만 먹겠는가? 때문에 우리는 문자문화와 구술문화를 모두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의 타자

두 문화의 특징은 1페이지에서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는 거의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 차이점의 가장 큰 원인은 타자의 유무이다. 구술문화의 말은 언제나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 실제 상대방이 없는 경우라도 발화자는 상대가 있는 듯이 말을 해야 한다. 말은 교환되기 위해 뱉어진다. 상대의 정신에 따라서 교환되는 말이 다르므로 내가 뱉을 말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구술성에서 타자는 필수적이다.

문자는 타자 없이도 쓰여질 수 있으며, 타자 없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자 또한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를 통해 가치를 부여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때문에 문자의 내러티브에서 심심찮게 허구의 독자와 세우고 그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식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것은 허구일 뿐, 문자에서는 실제적인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문자문화에서 구술성을 포함시키겠다는 것은, 그럼에도 타자를 보겠다는 것이다. 


독자를 허구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쓰기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쓰기 과정은 복잡하고 불확실성을 띤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가운데 쓰고 있는 전통—만약 바란다면 이것을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말해도 좋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전통 안에서 어떤 허구적 구실, 즉 실제 독자가 그것을 대표할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을 수행하게 되어 있는 허구적 구실을 실제 독자를 위해서 창조할 수 있다. 눈앞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정신 내부를 살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 대부분이 이후에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람들이 속한 문학 전통에 익숙하다면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_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 273p


실재하지 않는 수신자를 허구로서라도 세워서 타인의 정신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옹은 이것이 ‘그러한 사람들이 속한 문학 전통에 익숙하다면’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그러한 사람이란, 문자를 사용함에도 타자의 정신을 살피고자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타자와 교류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자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타자에게서 소외되어 개인적인 내면화의 심화를 경험한다. 그러나 허구적 독자를 내세우는 쓰기를 통해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타자와 의식적인 상호작용을 북돋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은 일차적 구술성과 같은 타자에 대한 완전한 개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쓰기를 통해서 이를 수 있는 하나의 길이다. 길은 여전히 길이다. 그러니 쓰기의 폐쇄성에 갇혀 정지하는 것보다는 쓰기 속에 끊임없이 구술성을 포함하려 노력하며 타자에게 닿기 위한 시도를 해보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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