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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장 동물로서의 고대 식물신 - 자기 살해에서 희생 제물로
곡물정령을 동물 형태로 상상하거나 표현해 왔다. 레시는 숲,나무 정령인 동시에 곡물의 정령이다. 숲속을 거닐때는 나무만큼 키가 커지지만 풀밭을 걸을때는 풀보다 키가 작아진다. 추수 전에는 키가 곡식 줄기 만큼이고 추수 후에는 그루터기만한 키로 작아진다. 이는 나무정령과 곡물정령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쉽게 변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곡물, 나무정령은 흔히 염소로 표현된다. 염소는 숲속을 돌아다니며 나무껍질을 즐겨 뜯어먹기 때문에 나무에게는 가장 파괴적인 존재이다.
돼지는 동물 모습을 한 여신이자, 데메테르에게 바친 동물이다. 돼지가 제물로 사용된 이유는 돼지가 곡식을 해치는 동물이고, 그래서 여신의 적이기 때문이다. 신이 자신의 동물 형상을 벗어 버리고 순수하게 인격신의 형태로 나타날 경우, 처음에는 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살해당한 동물이 이제는 신의 적이라는 이유로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간주된다. 신 스스로가 자신의 적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돼지고기 일부는 먹고, 일부는 다음 해까지 보관해두었다가 풍작을 위해 곡식에 섞어 밭에 뿌리고 일꾼들이 먹었다. 곡물정령은 가을에 동물 형태로 살해당하고, 숭배자들은 그 육신의 일부를 성찬으로 먹고, 일부는 곡물정령에 내재된 활력의 연장과 재생을 보장하는 담보로서 다음 파종기나 추수기까지 보관한다. 이것은 돼지 형상의 곡물정령이라는 낡은 관념과, 인간 형상의 여신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에라폴리스에서는 돼지를 제물로 쓰지 않으며 먹지도 않는다. 또한 만일 어떤 사람이 돼지를 만지면 그날 하루 동안 부정 탄다고 여겼다. 이는 돼지가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하고 돼지가 신성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는 종교사상의 모호한 상태를 시사한다.
이집트에서도 돼지가 이중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매년 한 차례씩 돼지를 제물로 바칠 뿐 아니라 그 고기를 먹기까지 했다. 그날 외 다른 날에는 절대 돼지를 제물로 바치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집트인들은 돼지를 부정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너무 신성하다고 여겼다. 돼지를 단순히 더럽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고도의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 간주했으며, 그것을 숭배와 혐오의 감정이 거의 비슷하게 뒤섞인 원초적인 종교적 외경심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동물을 매년 단 한 차례씩 제물로 바칠 경우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 자신의 대리자로서 살해당했던 것이다. 오시리스에게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관습은 돼지가 원래 신이었으며, 그 신이 곧 오시리스였다는 것을 말한다. 후대에 이르러. 오시리스가 인격신으로 바뀌면서 돼지와의 본래적 연관성이 잊히자, 신화 작자들은 먼저 그 동물을 신에게서 분리하고 뒤이어 신의 적으로서 대립시켰다. 곡식밭을 헤치는 멧돼지의 못된 소행은 그것을 곡물 정령의 적으로 간주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제공해준다. 본래는 멧돼지가 곡식밭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바로 그 자유로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멧돼지를 곡물정령과 동일시하게 만든 것이며, 그러다가 후대에 이르러 멧돼지가 곡물정령의 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어떤 존재에게 모순되는 양가감정이 애매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 시간이 흐르면 그 모순된 양가감정 중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세해지는데, 이때 다른 쪽을 압도하는 감정이 숭배감이냐 혐오감이냐에 따라 그 감정의 대상물은 신으로 승격하든가 아니면 악마로 전락한다.
신화는 변하더라도 관습은 종종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종교의 역사란 낡은 관습에 새로운 이유를 갖다 붙이거나 혹은 부조리한 관습에서 보다 정합성 있는 이론을 부여해 온 장구한 시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