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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주입 받을 것인가, 생산할 것인가
원시시대에는 먹는다는 것에 대한 지금과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 생명유지나 감각적 쾌감, 정신적 허기를 채우는 수단이라면 원시인들에게 먹는다는 것은 생명유지 외에도 일종의 자기 조작술로 작동하기도 한다.
사슴 부족은 그들이 신으로 여기는 사슴을 먹고 민첩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곰 부족은 영민한 상위 포식자인 곰을 먹고 곰의 힘을 획득했다고 여긴다. 사슴과 곰을 먹는다고 해서 그런 기분과 힘이 날까. 정신 승리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민첩한 사슴을 사냥 하고, 영민하고 힘 센 곰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러한 힘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원시인들은 생각보다 매우 관념적이다. 관념적이라는 것이 신을 믿고 숭배하지만 기도를 올리고 의탁하는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다. 원시인들은 관념을 생산하는 행위를 한다. 사냥을 하고 주술을 하는 것은 모두 행위에서 태어난 관념을 만드는 삶의 방식이다.
요즘처럼 유트브나 넷플릭스로 감정이나 관념을 주입 받는 게 아니라, 직접 몸소 행위하고 그 결과물로 원하는 관념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관념은 다음 행위의 거름이 된다. 영민하고 힘 센 곰을 사냥한 곰 부족은 곰을 먹고 더 영민해지고 힘이 세지는 부족이 된다.
재앙의 전이는 감염 주술로 중간에 매개체가 있다. 인간, 동물, 사물이 매개가 되어 재앙이 전이된다. 재앙을 전이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을 자신에게서 추방하는 행위이다. 좋은 건 가지고 좋지 않은 건 다른 사물, 동물, 사람을 통해 결국 다른 사람에게 전이한다. 원시인들은 모두 재앙의 전이를 하고 상대가 전이하는 재앙에 노출되어 있다. 왜 재앙이라는 부정적인 것을 주고받을까. 긍정적인 것을 주고받는 건 황금가지에 잘 나와 있지 않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자신이 충만한 상태여야 하고, 원시인들은 그럴 여유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추장이 한번 씩 포틀래치를 하거나 곰 사냥 후 곰을 나눠 먹는 관습에서 사냥에 참여하지 않은 아이들이 같이 먹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긍정성 보다 부정성이 인간이 기본적으로 처한 상황이다.
긍정성은 긍정성 그대로 존재할 수 없다. 긍정성은 부정성을 거쳐 부정성을 극복한 결과이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긍정성은 어린아이의 낙천성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자를 만난 아이가 사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맞이하다가 잡아 먹힐 수 있다. 사자를 만난 성인은 사자와의 대면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한다. 하지만 사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면 그때 나타나는 기쁨이야 말로 부정성을 거친 긍정성이다. 이게 진짜 긍정성이 아닐까.
내 삶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낙천적일 나이는 지났고 삶이 부정적이라는 건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지, 잘못된 건 아니다. 앞으로 삶의 훈련을 통해 부정성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관념을 생산하는 능동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