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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aerim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6-30 15:29 조회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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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30/제4장-작업/청비탐1학년/한태림


수업시작 전, 제기된 질문으로 후기를 열어보자. 아렌트는 노동하는 인간과 호모파베르를 구분한다. 근대의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책은 근대의 인간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호모파베르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렌트는 산업사회 이후에는 호모파베르가 없다고 말한다. 책에 등장하는 호모파베르는 고대 그리스적 호모파베르와 의미가 다르다. 산업사회에서는 노동한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부여되었고 노동을 칭송하듯 호모파베르를 칭송하게 되면서 단어의 뜻이 변질되었다. 그러니 책의 맥락을 잘 파악해서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다름을 포착해야 한다. 호모파베르는 소비로 일순간 제거되는 일회적 사물이 아닌 지속성의 힘이 깃든 사물을 제작한다. 여기에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의미는 초월성을 함축한다. 또한 자연이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한 필연성을 거부한다. 

  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필연성이 부여된 노동이 될 수도, 호모파베르의 작업이 될 수도 있다. ‘밥을 먹는다’고 말할 때, 노동하는 동물은 단지 굶주림이라는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다. 그러나 호모파베르는 어떠한 영속적인 의미가 부여된 행위를 하기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는다. 따라서 후자는 생리적인 부분을 해결한 행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작업을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임으로 초월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아렌트는 호모파베르의 작업을 왜 폭력이라 정의했을까? 작업은 자연의 순환은 거부한다. 필연성은 먹히고 먹는 것이다. 작업은 그러한 필연을 거부한다. 생존을 위한 무기로서의 돌이 아닌 조각을 위한 돌의 사용은 폭력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물이 가지는 목적, 의미들은 그것을 담고있는 껍질이 자연에 융화되어 도태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념적’으로 남아있다. 인간은 자연의 필연을 비껴가는 그 영속성을 제작함으로서 전능감을 느낀다. 자연을 변형시키고 재구성함으로서 느끼는 전능감은 인간을 자연과 유리시킨다. 인공세계는 자연과 유리된 전능화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은 목적들에 둘러싸인 사물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투영시킨다. 그러한 투영은 마침내 인간의 본질은 변한다는 필연도 거부하게 된다. 인간에게도 사물처럼 정체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본질을 거부하는 일은 내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들을 거부하며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특정한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견디기만 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이것을 아렌트는 폭력이라 보았다. 지속해야할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폭력을 전제해야 가능하다. 지속성의 세계와 나의 본성을 거세하는 힘은 함께간다.  자연은 순환 운동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변화의 장(場) 자체이다. 자연도 변하고, 인간도 변하는데, 어떻게 동일한, 일관성 있는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인공세계 속에서 비로소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할 수 있다. 

 “기술은 더 이상 ‘물질적 힘을 확장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유기체의 내적 구조가 점점 더 인간의 환경으로 이식되는 인류의 생물학적 발전인 것처럼”나타난다. 컨베이어 벨트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는 노동이 만연해짐으로서 ‘과정에 대한 예찬’이 함께 떠올랐다. 그러한 과정은 어떤 목적지로 향해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고 목적을 순환의 쳇바퀴로 전도시킨다. 목적자체가 수단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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