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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자 영성탐구 코스에서는 접속하고 순환하는 몸=마음의 기본기를 수련합니다. 노동, 화폐, 쾌락의 삼중주에 속박된 신체를 리셋하고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산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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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 수련 후기] / 2학기 10주차 /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 외

게시물 정보

작성자 보라 작성일21-07-23 19:19 조회1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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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 '동굴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사악한 생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청정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최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을 읽었습니다. 많은 것 같지만 여덟 게송으로 된 짧은 경들 입니다 :) 저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으로 인연담 발제를 했는데요. 인연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


한 바라문에 강 언덕에 옥수수 밭을 경작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탁발 하러 마을로 가던 중이던 부처님께서 바라문을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겁니다. 부처님의 호의에 기뻐진 바라문은 옥수수를 수확하면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대해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옥수수가 채 익기도 전에 거센 폭우로 인해 홍수가 져서 강 언덕에 심어둔 옥수수들이 모두 떠내려갔습니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았던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에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을 설하십니다.


저는 이 인연담 읽고 부처님께서 옥수수 바라문(?)에게 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해 말씀하신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저에게 감각적 쾌락은 눈, 코, 입, 귀, 몸과 같은 감각기관과 관련된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옥수수 바라문은 명성있는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 기뻐한 대상은 '인정을 받은 나'이고, 이 '인정을 받은 나'는 곧 감각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나'라는 것도 감각적인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보기에는 좀 이상합니다. 네 번째 게송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요.


4. 농토나 대지나 황금, 황소나 말, 노비나 하인, 부녀나 친척, 그 밖에 사람이 탐내는 다양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숫타니파타』, 752쪽)


그 어디에도 '자아'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래도 꾿꾿하게, '나는 감각적인 것이다!'라고 발제를 해갔는데요. 근영샘과 친구들과 다시 찬찬히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제가 인연담을 오독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근영 샘께서는 옥수수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는 정말 옥수수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발제를 준비할 때 미솔이에게 인연담에서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무엇인 것 같느냐고 물어보았는데요. 미솔이가 "당연히 옥수수지!"라고 해서 당황했었거든요. 미솔이는 감각적 쾌락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면서 자극적인 음식이 없던 당시에는 옥수수도 쾌락의 대상일 수 있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옥수수의 맥락(!)은 바라문이 옥수수를 먹느냐 먹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시간과 수고를 들여 키운 옥수수 밭에 대한 애착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발제에서 옥수수를 간과하고 인정욕망이라는 서사를 만들게 된 이유로 선생님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옥수수이기 때문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만약 돈이나, 황금같은 재물이었다면 간과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요. 그러자 주희는 확실히 농사지은 옥수수가 모두 떠내려갔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고,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간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옥수수가 재물처럼 여겨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라문이 옥수수를 심고 키우는 데 들이는 수고와 노력이라든지, 그 옥수수로 생계를 유지한다든지 하는 것들에 공감은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무엇에든 공을 들이면 애착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그걸 간과했다는 건 타인의 상황이나 입장을 깊이 만나고 공감하는 힘이 없다는 뜻이겠죠. 용제가 텃밭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고 있으면서도 말이죠. 텍스트에, 사람에 착 밀착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태도로 만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맥락을 보지 못하고 잘 못 읽었구나~하고 알았을 때, 그럼 정답은 뭐지? 하고 바로 넘어가고는 하는데요. 근영 샘게서는 어떤 지점을 놓치거나 다르게 읽게 됐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지점에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텍스트와 찐하게 만나기! 오독은 할 수 있지만, 오독을 통해 내가 어떻게 텍스트나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


근영 샘께서는 이 경에서 새롭게 생각해볼 지점이있다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감각적 쾌락과 떨어질 수 없다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대상이 무엇이든 소유 그 자체가 감각적 쾌락을 준다니... 택배상자를 개봉할 때의 즐거움 같은 것일까요? 알맹이를 누리고 활용하는 것보다는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감각으로부터 쾌락을 느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무언가를 가졌다는 감각은 왜 쾌락을 줄까요?


사악한 생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옥수수 논쟁(!)이 끝나고, '사악한 생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으로 토론을 했습니다. 이 경의 인연담은 유명해서 부처님의 생애를 다루는 전기에서는 꼭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일화기도 하고요. 그래서 근영 샘께서는 인연담 발제를 고르는 안목(?!)에 대해서도 피드백을 주셨는데요. 유명하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된다는 뜻이고, 많이 회자된다는 건 그만큼 생각해볼 지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렇게 유명하거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인연담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발제를 해왔거든요 ^^;; 근영 샘께서는 인연담을 성인(聖人)이니까 가능한 이야기로 치부하면서 나의 삶과 생각에 적용해보지 않으려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한다고 하셨어요. 이 또한 텍스트와 거리를 두는 방식인 것이죠. 이렇게 텍스트와 나의 삶이 만나지 못한채 따로 떨어져 지낸다면 배움이 일어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경의 인연담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명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자, 다른 교단의 수행자들은 위협과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대중들에게 받는 존경과 원조가 곧 생활 자원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닙니다. 이교도의 수행자들은 유행녀 쑨다리를 이용하여 고타마 부처님의 명성을 깎아내릴 계책을 꾸밉니다. 저녁마다 부처님이 계신 제따바나 숲으로 쑨다리를 보낸 것이죠. 그리고 쑨다리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향실에서 밤을 보내고 오는 것처럼 꾸미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임신을 한 척 하기도 했지요. 얼마 후, 이교도들은 악당을 고용해 쑨다리를 살해해서 제따바나 숲 근처에 버립니다. 그리고는 쑨다리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소동을 일으켰죠. 이 소식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조사가 이루어졌고, 쑨다리의 시신이 부처님 향실 근처에서 발견됐습니다. 이교도들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한 짓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소문이 돌자 아난다는 부처님께 다른 도시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잘못된 조사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어리석음을 꾸짖고, 칠일 후에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말하며 제자들에게 이 경을 설하셨습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누명을 쓰게 되는 일.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일 같지만 우리도 한번쯤은 경험하는 일입니다. 쑥이는 만약 자기가 부처님의 상황이었다면 억울해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라고 했는데요. 저도 제가 하지 않은 일로 모함을 당하면 진실을 밝히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도 않으십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칠일 후에 술에 취한 이교도 살해자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나 진실이 밝혀지게 되지요.

한결이는 이렇게 부처님께서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1번 게송에 있다고 보았는데요.


1. 사악한 생각으로 남을 비방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진실이라고 믿으며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는 비방이 생겨나더라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자에게는 어디에도 장애가 없다. ('사악한 생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숫타니파타』, 758쪽)


소문을 듣고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아무리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거죠. 따라서 억울함을 밝히려는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데다, 종국에는 침묵함으로써 진실이 밝혀졌으니 진정한 해결 방법을 보여주려 하신건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근영 샘께서는 부처님께서 억울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일주일의 침묵이라는 방편을 필요로 하신 걸까?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뭘 해결하고 싶어하시는 건지를 인연담의 맥락 위에서 다시 살펴보자고 하셨는데요. 이 경은 아난다가 쑥덕대는 소문을 듣기 불편하니 다른 도시로 피신하자고 말하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게송입니다. 아난다가 억울함을 밝히자고 한 것에 대해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 아닌 거죠. 부처님께서는 오해나 소문을 피하고자 하는 태도를 문제삼으신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이 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근영 샘께서는 부처님께서는 애초에 억울해하지 않으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럼 우리는 대개 부처님께서 억울한 상황에서도 억울해하지 않으셨으니까 억울함을 참아야 한다는 식으로 도덕적 결단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근영 샘께서는 도덕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이애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왜 누구에게는 억울한 마음으로 올라오지 않는데 누구에게는 억울한 마음으로 올라오는지, 두 가지 마음이 올라오는 매커니즘을 이해해야하는 것이죠!


우리는 언제 억울한 마음이 들까요? 내가 스스로 떳떳한지를 묻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신경쓸 때 억울한 마음이 올라 옵니다. 내가 그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죠. 3번과 4번의 게송에서 그 차이를 보여줍니다.


3. 사람이 묻지도 않는데, 남에게 자신의 계율과 맹세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그를 두고 선한사람들은 천한 자라고 말한다.

4. 수행승이 평안하고 완전히 고요해져서 '나는 이러하다'고 계행에 대해서 뽐내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파도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를 두고 선한 사람들은 고귀한 님이라고 말한다.

(같은 책, 759쪽)


전자는 자신의 견해를 묻지도 않은 사람에게 말하고 다닙니다. 후자는 '나는 이러하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죠. 이 경에서는 두 사람의 차이가 '견해에 대한 집착' 여부에 있다고 말합니다. 견해에 대한 집착과 남에게 말하고 다니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의 반응에 휘둘리는 걸까요? 세미나가 끝난 후에도 많은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정견 수련 2학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빨라요^^;;

텍스트에 찰싹 달라붙기!

도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마음의 원리를 이해하기!

다음 학기에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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