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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용 2학기 6주차 『농경의 배신』 이용제

게시물 정보

작성자 이용제 작성일21-06-15 21:53 조회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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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21.06.16 / 청용 용되기 수련 / 농경의 배신2/2 발제 / 이용제

 

붕괴도 좋다

 

인류의 현재

 인류는 국가를 중심화하며 살아가던 중에 분산되어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자연의 리듬을 따라가며 여러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류는 대부분이 사라졌다. 농경과 국가라는 삶의 양식 이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한 생물 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져 생존확률이 낮아진 것이고, 한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웬만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농경 국가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농경이외의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내가 현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곧 자본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돌아가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수렵채집인이나 야만인처럼 국가 없는 공동체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일단 농경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다. 우리의 식사만 봐도 쌀밥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다양한 것을 먹고 지낸다고는 해도 결국 기본적으로 곡물을 먹고 싶어 한다. 욕망 자체가 단일화 된 국가의 농작물인 곡물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어찌저찌 욕망을 무시하고 국가없는 공동체로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수렵채집인이나 야만인들도 좋아서 국가에 흡수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수렵채집인들의 경우 농경을 시작한 이후 돌아갈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도무스에서 생성된 질병이 도무스 밖에서 살아가는 수렵채집인들의 생존을 위협했다는 점이 그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야만인들은 국가를 바라지 않았다. 국가라는 자원창고를 이용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었다. 일 년 내내 농사를 하느니 수확한 것을 빼앗아오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고, 국가를 이루기보다 국가에서 자원을 꾸준히 받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방식을 거부했음에도 그들은 국가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분명 그들 자신에게 좋은 것을 했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가 다시 그렇게 산다고 해도 같은 수순을 밟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같은 방식의 역사가 반복될 뿐일 것이다.

 

시야가 짧은 인간

 결국 모든 것은 우연적이다. 국가의 형성도 그렇다. 인류는 농경과 국가라는 방식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겨서 선택하지 않았다. 닥쳐오는 우연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괜찮은 것을 고르다보니 국가라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변화하는 기후에 맞춰 이동하기도 하고, 모여서 도무스를 만들기도 하고, 강이 마르고 토양이 변화하자 밀집되어 초기 국가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아주 짧은 시야 내에서 스스로에게 좋은 것만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연적인 상황에 대해 아주 자잘하고 근시안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길을 걷다가 비가 온다고 하면 우리는 우산을 쓰거나 비를 맞는 등의 아주 작고 미묘한 선택만을 할 수 있다. 비를 내리지 않게 만들 수는 없다. 국가라는 체계도 마찬가지다. 국가를 진보적으로 보면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계획적이고 합리적으로 삶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때그때 주어지는 한정적인 선택지를 골라오다보니 우연히 생겨난 것이 국가일 뿐이다. 한정적인 선택지라는 것은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결국 선택은 없고 우연적인 것만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우연적인 환경 속에서 짧은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갑작스럽게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일화라는 하나의 관점

 국가는 진보하며 발전한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상황에 따른 한정적인 선택으로 발생한 우연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완벽한 것도, 마냥 좋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국가가 설정하는 틀에서 벗어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국가의 선택도 근시안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니 말이다.

 

붕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최소한 그것은 기념비적인 궁정 중심지의 포기 그리고/또는 파괴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개는 단지 인구의 재배치만이 아닌, 사회적 복잡성의 실질적 상실-재앙적 상실까지는 아니더라도-을 의미한다. 인구는 제자리에 그대로에 그대로 유지될 경우에도 더 작은 정착지와 촌락으로 분산되었을 것이다. 지배층은 사라진다. 기념비적 건춘 활동도 멈춘다. 행정과 종교를 목적으로 한 문해력도 증발할 것이다. 보다 큰 규모의 교역과 유통은 급격히 줄어든다. 지배층의 소비와 교역 용도의 전문 공예품 생산도 감소하거나 없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보다 문명화된 문화로부터 멀어지는 통탄할 만한 퇴행이라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이 측면에서 보자면, 이와 같은 사건이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의미들을 강조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 사건들은 해당 지역 인구 감소를 필연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류의 건강이나 복지 혹은 영양 상태의 악화를 필연적으로 의미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향상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결국, 중심에서의 붕괴란 문화의 소멸이 아니라 문화의 재공식화와 탈중심화를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제임스C. 스콧 농경의 배신241~242p)

 국가의 틀을 벗어난 사고라는 점에서 국가의 붕괴를 생각해보자. 초기 국가는 허약했다. 그래서 쉽게 붕괴했다. 붕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가붕괴를 생각하면 끔찍한 불행이라는 느낌이다. 국가의 관점에서 붕괴는 종말이다. 국가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도 붕괴는 종말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붕괴는 불행이라고만 설명할 수 없다. 초기 국가의 붕괴 이후 흩어진 사람들은 그 이후에도 살아갔다. 심지어 국가보다 더 길게 유지되었고, 더욱 안정적일 수 있었다. 식량의 단일화는 (단번에 전환되지는 않더라도) 서서히 풀려서 안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구와 다른 생물의 밀집이 불러오는 질병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붕괴는 불행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국가의 방식이 더 불행하고 위태로운 방식일 수 있다. 하지만 인류는 국가가 아닌 방식은 모두 틀린 것으로 느끼고 있다. 국가 이외의 방식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리해보면 상황은 우연적이고, 따라서 인간의 시야는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스스로 국가라는 진보된 발명품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연적으로 구성된 역사가 보여주듯 국가는 진보가 아니고, 초기 국가의 붕괴가 보여주듯 국가는 유일하게 옳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착각 속에 있기보다 이것저것을 찔러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다르게 되기(국가의 기준으로는 계속해서 틀려보기), 붕괴되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짧은 시야 때문에 단번에 옳은 것을 찾아나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좌충우돌하는 것이 좋겠다. 꾸준하게 틀리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수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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