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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자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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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자 2학년 숙제방

3학기 에세이 / 준혜 / 안티크리스트

게시물 정보

작성자 준혜 작성일22-10-24 23:00 조회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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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밴 3학기 에세이 - 안티크리스트 _ 준혜.hwpx

새로운 의 등장


언젠가부터 내겐 인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체계가 생겼다. 바로 인간은 선하다!’가 그것이다. 이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냐면 음, 사실 어디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인간은 선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해왔다.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선함을 잃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겸손한 태도로, 착하게, 배려심 있게 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내가 겸손하고, 착하고, 배려심 있기만사람이 아닌데, 자꾸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내가 하려면 아주 조곤조곤하고, 여리여리하고, 순진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나의 어떤 선하지 않은 기질들을 숨기고, 억눌러야만 선해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선해져야 하는 나선하지 않은 나의 기질사이의 간극을 숨기는 일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내 행동들은 심히 어색해져갔다. 그만큼 난 수많은 합리화와 자책을 하는 피곤한 과정들을 거쳤다. 좀 덜 피곤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만난 니체는 내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던져주었다. 내가 애써 외면하고 숨겨온 나의 기질, 니체의 표현으로 나의 본능이 바로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삶 자체는 성장과 존속을 향한 본능,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19)이다. 이 본능을 증대시켜 나가는 게 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지금껏 이런 본능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겐 이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생각은 없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내가 생각해온 착하고, 여리여리한 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폐해다. 그는 나의 본능을 부정하게 만들고, 나를 연약하게 만드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난 이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선을 이런 방식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니! 내 본능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니! 내가 좀 덜 피곤하게 살 방법,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이 궁금하다!

연민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니체가 말하는 을 알아보려면, 일단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 어떤 것인지부터 분명히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려면 우선 니체가 그토록 안티하는 크리스트(기독교)’를 들여다봐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착하고, 조곤조곤하고, 여리여리하고, 순진한 은 기독교가 그토록 원하는 인간유형의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갖가지 의 특징들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기독교의 연민이다. 니체는 연민의 시선이 서로를 나약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간을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강렬하게 비판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연민(Mitleden)의 종교라고 부른다. 연민은 생명의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강장제로서 작용하는 감정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연민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힘을 상실한다. 괴로움 자체로 인해 이미 삶에서 일어난 힘의 손실은 연민 때문에 더욱 커지고 늘어나게 된다. 연민을 통해서 괴로움 자체가 전염성을 갖게 된다.

(박찬국 옮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티크리스트아포리즘 7, 아카넷, 2013, 24)

연민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던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아야 했다. 난 누군가를 불쌍히 여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를 공감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단어가 좋은 것처럼 여겨지니 연민도 긍정적으로 보였을 뿐, 이런 상황에서 공감을 느끼게 될 때를 생각해보면 딱히 뭔갈 하진 않는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울적한 기분을 느끼고, 가까이 있는 상대라면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전부다. 물론 이 위로의 말이 거짓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연민의 대상인 상대의 처지가 내 처지가 아니라는 것에 묘한 안도감을 생긴다. 그런 면에서 생명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강장제로서 작용하는 감정과 연민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연민을 느낄 때면 그 대상에 대해 조언보다는, 순간적으로 무조건적 위로나 호의를 무한정 건네게 되는데 그건 상대를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즉 약자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으로 보는 것은, 또 이런 식의 공감은 서로의 생명에너지를 깍아먹는 행위다.

기독교에서 이렇게 인간의 힘을 꺽어버리는 연민이 강조되는 이유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 만들기 위함이다. 약자를 불쌍한 존재, 도와줘야 하는 존재, 강자에게 희생당한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강자들은 약자들을 이겨먹은 존재,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약자들은 본인이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을 강화시키지 않으며 자신들을 도와줄 누군가()을 찾게 된다. 강자들 역시 자신들의 힘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강자가 된 자신의 ''에 대한 죄의식을 갖게 되어 이것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게 된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연민은 우리 인간이 힘을 상실하게 하고, 기독교라는 제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끔 나약하게 만드는 매우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나는 지금껏 연민을 유발하는 약자를 선한 존재로 생각했던 거다. 인간을 약자로 만드는 선함’, 기독교의 연민은 스스로를 도움이 필요한 존재, 혹은 잘못을 한 존재로 결핍적인 사고를 하게 하고, 하나의 고정된 이상향(나의 경우 겸손하고, 여리여리하고, 배려심많고 기타 등등)’으로 거기에만 맞춰가게 만든다. 나는 여기에 맞춰지지 않을까봐 늘 걱정하고, 간극을 느끼고, 나 스스로를 어색해 하고, 피곤한 계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힘은 현실성 위에서 강해진다

반면 니체에게 힘의 감정, 힘에의 의지,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17)이다. 이때 이란 내가 그렇게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본능, 우리의 본질적인 욕망을 이야기한다. 니체는 이게 인간의 힘이고, 이를 증대시켜 나를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니체가 말하는 은 일단 우리를 정신적인 건강함(128)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하나의 이상향에 나를 맞춰 끼울 필요도 없고, 걱정이나, 간극을 느낄 필요도, 피곤한 계산을 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어떤 당위가 아닌 자기 동력으로 움직이게 된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바로 본능적 욕망이 아니던가. 나는 정체모를 기독교적인 선함을 내려놓고, 니체의 사고방식으로 갈아타보고자 한다. 여기서 관건은 그래서 이 본능을, 본질적인 욕망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증대해 갈 것인가?’이다.

내가 그동안 수많은 합리화와 자책을 거치며 피곤하게 살았던 것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간에, 내 옆에 누가 있든 간에 기독교적인 선함이라는 이상향을 고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왜곡하는데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다. 니체는 현실을 왜곡시키며 도망가는 인간은,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 자(43)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행동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나의 이상향과 다른 현실의 나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을 내버리고, 언제 생겼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이상향 나를 짜맞추느라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주변을 소외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나의 이상향을 고집하기 위해 현실은 소외시키는 방법은 꽤나 다양했다. 그냥 굳어서 자체적으로 돌이 되기도 하고, 울게 되기도 하고, 거짓으로 둘러댄다거나, 아예 그 상황에서 숨어버리기도 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도망치는 동안 현실에서는 주변 사람들이나, 상황이나, 관계성 등등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알고 한 짓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이런 현실에서 도망친다는 건 그 난감한 상황을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의 실수라고 퉁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복되는 도망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현실에 발맞춰가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떤 태도든 간에 현실성을 고려하지 않는 건 자기소외로, 내가 주변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일로 이어질 뿐이다. 내가 기독교적인 선함을 내려놓고 니체가 말하는 본능의 증대로 갈아탈 것이라면, 현실성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내 힘을 증대시키는 방식은 달라지는 현실에 따라 변화를 꾀할 수 있어야 하고, 니체가 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려면 현실 위에서 내가 있어야 한다.

회의를 통해서 만나는 현실

물론, 너무 오랫동안 이상향을 쫓아온 나는 현실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읽다가 가장 눈에 들어온 건, 회의(133)였다. 니체에 따르면 회의는 확신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한다. 확시은 마치 내가 인간성이 기독교적 이라고 믿음체계를 가졌던 것처럼 나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회의는 대게 예상치 못하게 오는 사건들, 상황들, 관계들에 의해 전제를 갈아엎을 수 있게 하는 장치다.

회의가의 존재 근거이자 존재의 힘인 위대한 정열, 곧 회의가 자신보다도 훨씬 더 개명되고 훨씬 더 전제적인 위대한 정열은 회의가의 지성 전체를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것이 회의가를 대담무쌍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것은 신성하지 못한 수단들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까지 부여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은 확신마저도 허용한다. 수단으로서의 확신! 많은 것이 확신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위대한 정열은 확신을 이용하며 확신을 다 사용해버리고 확신에 굴복하지 않는다.

(박찬국 옮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티크리스트아포리즘 54, 아카넷, 2013, 134)

니체가 말하는 우리의 인간의 본능은 삶의 성장과 존속에 대한 힘의 본능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고, 기독교적 선함과 같은 것에 수단으로도 내주지 않고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133)이 바로 강한 힘일 것이라 생각한다.

회의가들은 바로 이런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지성 전체를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목적은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지고자 하는, 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그동안 만들어진 확신들이, 자신들의 전제들이 딱히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을 만나는 걸 즐거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확신도 허용이 된다. 확신한다고 해서 고집을 부릴 이유도, 도망칠 이유도, (각자가 만나는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와 비교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회의가가 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나의 이상향이 자기소외로 이어졌던 것을 타파하려면 내 확신을,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나를 지키는 것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갈아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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