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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읽생 철학학교 2주차이자 천개의 고원 3장인 '기원전 1만년ㅡ도덕의 지질학' 후기를
맡은 조관희입니다.
태풍 링링은 서울에 상륙했고 천개의 고원 3장은 다른 장들에 비해 난해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강력한 강렬도를 뚫고 수업에 참석했습니다 ㅎㅎ
입발제 첫 타자인 저와 마지막 타자인 순이샘은 140쪽의 아마존 족 잔사들이
여자-활-스텝이라는 배치물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 가슴을 자르는
부분에 강렬도를 느껴 추상적인 기계와 기계적 배치물에 대해 입발제했습니다.
충무샘은 생명의 종을 외형으로만 분류하기 힘들며 DNA나 혈통 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부분을 입발제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나라는 개체군은 우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요.
저와 충무샘 같은 경우에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는데 머물렀다고 근영샘이 말해줬습니다.
이 말을 위 용어로 풀이해보면 저는 천개의 고원 3장인 기계적 배치물의 요구에 따라 추상적인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같습니다.
141쪽에서
책이 묻습니다. “기계적 배치물은 어떻게 추상적인 기계를 작동시키며,
얼마나 적합하게 작동시키는가?”
책을 표면적으로밖에 접근이 안되는 것에 대해 근영샘이 책을 읽을 때 ‘이
부분이 이런 뜻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 그 뜻이 아니라고, 더
들어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즉 추상적인 기계를 작동한다는 것은 강렬도가 생산되게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행을 하려면 각자가 들고 있는 사고 패턴, 단어에 대한 기표로부터
한발짝이라도 더 도주해서(젖가슴을 자르고) 책의(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는데 이게 참 익숙지 않습니다.
순이샘 입발제에 대해서는 근영샘이 우리가 기계적 배치물을 그저 주어지는 것으로서 보는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배치물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게 아닌 적극적으로 만들고 관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난샘은 134쪽에서 언급되는 기호에 대해 입발제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아줌마, 학생이라는 기표로 규정하면 그 사람은
그 기표 안에 갇힌다는게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기호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기호의 용법을 다르게
해야한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기호의 용법에 대해서는 근영샘이 해석의 차원이 아닌 힘의 원리로서, 기운의 장으로서, 문턱으로서의 지칭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말해줬습니다. 즉 한 사람이 시공간을 떠나 아줌마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줌마’라고 정의되는 것의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아줌마가 되는 것이며 다른 행위를 하면 또 다르게 규정되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각 기호의 문턱의 규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정의하기 불가능하겠라는 생각과 함께 그 기호에 붙어 있는 감정으로부터 제가 자유로워야하는데 이것은 더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나를 배신한 친구가 나중에 배신했던 가치체계로부터 벗어난 후 저와 재회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때 친구를 재회했을 때 그를 ‘배신자’로 보는게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기운인 다른 단어로 재규정해야하는데 제 마음은 배신했던 행위로 그를 평생 배신자로 낙인 찍고 싶을거 같습니다.
다음은 근영샘의 입발제(?)가 남았는데요,
금영샘은 3장이 존재론으로서 들뢰즈의 다른 책 차이와 반복의 속편이라고 해주셨습니다. (존재론, 차이와 반복. 하나도
모르겠습니다…ㅜㅜ)
그러면서 모두가 궁금해하던 3장의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에 대해 답해주셨어요. 3장 제목인 도덕의 지질학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오마주라고 해줬는데요. 그럼
도덕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행위의 규범이자 가치체계라고 해줬습니다. 이 가치가 어떻게 발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니체는 도덕에 고고학의 방법을 사용했다면 들뢰즈는 지구의 입장에서
지질학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많은 방법 중 지질학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근영샘의 해석은 들뢰즈가 레비스트로스를 염두해두고 글을 전개해갔다고 했습니다. 먼저 3장에 나오는 개념인 이중분절과 이항대립이 있습니다. 이항대립은 실체와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다는 식으로. 이런 이항대립이 생긴 이유는 시대적으로 대항해시대였는데, 이때는 일항구조에서 인간, 문명(서양인)이 비인간, 야만을 교화, 착취 한다는 틀이 있었는데요. 이걸 타파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가 문명과 야만을 추상화하면 그 밑의 구조는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2항대립으로 옮겨갑니다. 이걸 문명에다가 적용하면 문명과 야만 중 하나가 월등한게 아닌 서로 다른 반쪽의 개념이 되면서 인간보편이라는 새로운 상위 개념이 생기는게 아닐까요? 여자와 남자로 이항대립이 생기면서 인간이라는 상위 개념이 생겨나는 것처럼.
이렇게 1항구조에서 2항대립으로
넘어가게 해준게 레비스트로스지만 들뢰즈는 레비스트로스의 추상화 과정을 긍정하면서도 레비스트로스가 더 추상화하지 못한 것을 이끌고 나갑니다. 이항구조의 문제가 실체와 형식으로서만 파악되기에 항상 하나의 항은 완전한 상위 추상에 못 미치는 반쪽짜리로
전락되기때문이죠.
이항대립을 더 밀고 나가기 위해 들뢰즈는 이중분절을 가지고 와 실체와 형식이 아닌 내용과 표현으로 세상을 바라봐야한다고
합니다. 이 이중분절이라는게 잘은 모르겠지만 이 힘이 추상기계이며 이 힘으로 인해 강렬도가 생산되는거
같습니다. 이중분절에 대한 힌트로 근영샘이 스피노자의 말인 ‘모든
존재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다’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즉 흐름이
어디서 접히느냐가 존재라는거죠.
이걸 생물학으로보면 (97쪽 조프루아와 퀴비에의 대화 참조) 배와 계통 발생에서 우리 인간과 병아리의 배를 보면 실체적으로 완벽하게 똑같다는겁니다. 하지만 이 세포가 어떻게 춤을 추고 배치되느냐에 따라 병아리와 인간이 나뉘게된다는겁니다. 즉 모든 존재는 겉모습으로 정해지는게 아니라 그 배치와 리듬에 따라 존재가 갈린다는 말! 아 그럼 들뢰즈의 ?되기 개념이 모방이 아니라 나의 배치, 생활리듬이 바뀌면 실체는 같을지 언정 존재가 아예 바뀌는거라는걸 알게되었습니다. ?되기는 정말 은유가 아니군요. 만약 내가 매일 아침 늦게 일어나다가
빨리 자고 새벽에 일어나면 이 둘 사이에 단절이 제대로 일어난다는거라고 이해했습니다.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게 아니라 오후에 일어나는 나와 오전에 일어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거죠.
그러면서 근영샘이 다음 수업까지 우리가 세상을 실체와 형식이 아닌 ‘강렬도’의 관점에서 봐라는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이런 방식이 저도 익숙하지는 않지만 실체와 형식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어서 ‘강렬도’로 세상 바라보기를 꾸준히 연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