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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조] 시즌10 <도덕경> 3/3 후기와 발제 (100/100)

게시물 정보

작성자 석영 작성일21-01-27 20:20 조회1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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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청백전 세미나 뭄조 시즌 10, 마지막 주 후기를 쓰게 된 석영입니다.

저희는 마지막 책인 도덕경을 이번 주에 마무리했습니다.

도덕경은 역시나 어려웠습니다. 마지막 시간이 오히려 가장 알쏭달쏭 했던 것도 같고요.

저는 발제문에서

1 목표나 목적을 갖기 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2 인생의 기로라는 것이 가끔씩 크게 한 번 오고, 그렇지 않을 땐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매 순간이 삶의 기로, 라는 내용을 썼습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커다란 선택이 아니라 나의 미세한 변화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씨앗문장의 핵심인 자연스러운 삶을 짚지 못했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자연은 카오스이고, 어떻게 이 흐름을 잘 탈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제 글의 방향이 여전히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된다면 목적 없이 현재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편집증(세미나에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너무 중요한 상태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해!’라고 집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집중이라는 상태 자체가 목표가 없는 지금 잠깐의 안심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상태를 자연스러운 것이라 맹신할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었습니다.

더불어 매일매일이 인생이 기로라는 생각을 하면, 바다 한 가운데에 떨어진 느낌이 되지 않을까? 패닉하게 될 것 같다, 어떤 길라잡이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자연스러운 삶이란 어떤 걸까요? 세미나에서 계속해서 반복된 말은 욕심을 갖거나,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흘러가는대로 산다인데...... 이 말로는 어딘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희조에서 주역을 열심히 공부하는 한 친구가 남회근 선생님의 계사전 책에 나온 인생의 목적은 인생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는 말을 꺼냈는데요. 다들 이 말이 도덕경의 자연스러운 삶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다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목표라는 것 자체가 지금은 불완전한데 가지면 완전해진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 인 듯 하다! 는 말도 나왔습니다. 우리는 살고 싶어 하고,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고민하는데,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건 어떤 걸까요? 그럼 어떻게 다르게 살게 될까요? 어떤 것들이 사는 것이상으로 우리의 목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우리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는 걸까요? 참 물음표가 많은 세미나였습니다.


답은 찾지 못하였지만 아리송한 도덕경을 많이 뜯고 씹으려 노력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들 청백전 세미나를 참 재밌게 해왔던 터라 헤어지기가 아쉬웠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기로 다짐을 하고, 마지막 시간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뭄조 모두의 자연스러운 삶을 응원하며...,,, (안녕~~!) 마지막 후기를 마무리합니다. ^^ 감사합니다.





무사(無事)히 하루를 사는 것

 

변화하는 삶 속에서 방향 잡기

요즘 나는 삶의 중요한 기로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코로나와 함께 연초를 맞아 많이들 이런 시기인 것 같다.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앞으로 갈 길을 다시 그리는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데 가끔 그 고찰을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내가 한쪽 길로 가면 잘 풀리고 다른 쪽 길로 가면 힘들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위에서 나는 A가 잘 풀릴 길인지 B가 잘 풀릴 길인지를 마음속으로 점쳐보게 된다. 이런 식의 고민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정말 지금의 순간이 내 인생을 좌우할까? 삶이 그렇게 직선적으로 흘러갈까? 그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안다. 자꾸 까먹을 뿐. 그렇다면 계속 상기하는 수밖에. 계속 변하는 삶 위에서 다음 스텝을 정할 때는 어떤 다른 태도와 척도가 필요할까?

 

유사(有事) 속 사소한 하루

앞으로 어떻게 살까를 생각할 때 우리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들은 간단하다. 지금과 같은 번뇌나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은 없었으면 좋겠고, 고생은 덜하고 싶다. 한데 지금까지 살아 온 꼴을 봤을 때, 이런 고민은 언제나 찾아오고 또 찾아올 것이다. 평생 고민 속에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척도를 바꿔보고 싶다.

 

자연적인 인간은 근복적으로 자연에 순응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데, 공연히 뭔가 잘 되게 해본다고 금하고 가리는 등 윤리 규정을 만든다, (...) 새 아이디어를 창출해서 뭔가 사회를 위해서 공헌한다, 기술을 개발하여 신기한 물건을 자꾸 만들어 낸다, 질서와 안정을 위해서 이런 저런 법령을 계속해서 제정한다 하는 등등은 결국 한편으로는 사람을 너무 주눅들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큰 야심을 품게 하므로 그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고, 더욱 혼미하게 하고, 더욱 괴상한 일을 꾸미게 하고, (...).

노자(오강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2019, p.264

 

도덕경에서는 나라를 다스릴 때, 무사(無事, 함이 없음)을 실천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말한다. 도덕경에 의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순응하여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한데 통치하는 자가 뭔가 잘 되게 하겠다고 규정을 만들고, 기술을 개발하고, 법령을 제정하는 등 과도한 의욕을 내면 그때부터 사람들도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자기도 뭐라도 하나 해야 할 것 같은 거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살기보단 뜬금없이 야심을 품거나, 반대로 자신이 너무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닌가 하며 주눅이 든다. 자연스럽게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통치받고 있다면, 그 말은 우리 욕망도 이런 식으로 흐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위에서라면 그냥사는 것은 뭔가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이는 뭔가를 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안정성은 보장받아야 하고, .......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려 할 때에도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자연스러움을 가로막는 유사(有事)의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이러한 식의 의지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외부의 요구와 내 안의 욕구들이다.

장자와 도덕경 세미나를 하며 여러번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런 요구나 욕구와 싸운다는 것은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냥 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유사에 사로잡힌것일까?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고민하느라 지금도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하루하루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 그때를 우리가 유사에 사로잡힌 순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스텝, 발을 어디 디뎌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오늘 먹은 밥과 오늘 읽은 책과 오늘 느낀 것들은 너무나 사소한것들이 되어버릴 때. 무언가가 사소하다는 것은 큰 게 어딘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유사.

 

하루가 충분해질 때

중요한 기로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삶의 기로이면서 동시에 과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삶 자체를 귀찮아 하기때문에 고민을 열심히 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민이 끝나면 ~!’하고 다시 생각 없이 살아가려고. 그럼 뭔가 좋은 게 떨어지겠지, 하며. 이 형식 자체가 문제다. 이 말이 자칫 절망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지금 정말 힘들고 진퇴양난의 때에 빠진 느낌이라면, 사람이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또 몰아치듯 찾아온 생각 할 거리를 못 본 척하는 건 내 삶을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린 이런 고민을 너무 쉽게 해결하려 해서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변혁이나 혁신이 정말 단기간의 고민과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할 것들이 감지되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다만 변화나 혁신이 그 순간 찾아와 삶을 판가름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변화나 혁신은 우리가 이제껏 집중하지 못했던 삶의 작은 부분들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성인은 욕심을 없애려는 욕심만이 있고, 귀하다고 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많은 사람이 지나쳐 버리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노자(오강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2019, p.293

 

어떻게 우리는 욕심을 없애려는 욕심만 가지고, 귀하다고 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배우지 않음을 배울 수 있을까? 이것은 기존의 유사의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기존에 욕망하던 것을 의심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쉬이 우리의 삶의 목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지금 당장 오늘 하루를 살만한하루로, ‘또 살고싶은하루로 만드는 것이 유일하지 않을까.

어느 길로 가야 좋을까?(무언가 이로운 게 생길까?)’하며 매번 다음만 중요하게 생각하던 내가 오늘 나의 눈이 시려서 이걸 잊으려고 핸드폰을 더 들여다 볼 수도 있겠다. 인공눈물을 넣자.’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고, ‘몸이 피곤하여 오늘 하루 건강한 기분으로 살 수 없겠구나라는 걸 담지하고 몸을 풀 때. 그리고 오늘 하는 독서, 필사, 만나는 사람 등에 집중할 때, 그거야말로 유사를 이겨내며, 삶의 기로에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은 이런 식으로 바뀌어 나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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