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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자 3학년
존재적 자립은 곧, 배움의 네트워크를 조직할 수 있고 읽고 쓰는 것으로 자기 사유를 생산할 수 있는 것. 이 고귀한 길, 함께 가봅시다!

청공자 3학년 청년 글로벌 리더-되기

[청글리] 2학기 7주차 후기 (in 그루)

게시물 정보

작성자 보라보라 작성일22-07-02 21:44 조회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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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미 기원담


이번 주에 굴드 선생님께서는 “온갖 기이한 동물과 해부학적 사실을 모조리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인물에 대해 쓴 글들을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셨는데요. 특히 “욕먹는 인물들에게서 존경할 만한 의도를 찾아내는 일”을 끊임없이 하십니다. 그들 주장의 논리를 통째로 재발견하거나 그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보는 단순한 방법(the simple expedient of rediscovering either the full logic of their argument or the social context of their claims.)"을 가지고 말이죠. 작년에 제가 세미나에서 굴드 선생님 에세이를 읽으며 가장 감탄했던 점이기도 한데요. 오만과 편견(?)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성실해야 하기도 하고요. 에세이를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굴드 선생님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고 심지어 비판하는 인물의 논리를 차근차근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상황적 맥락을 고려하기 위한 자료 찾기에 결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사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magma였습니다. 괄호 속에 잠시 나온 단어였는데, 줄자샘께서 이 magma라는 단어로부터 < Austin Powers>라는 영화를 소환하셨기 때문입니다.



미니미의 원조님(좌)과 'magma'의 원조님(우)


주인공이 magma를 발음하는 장면이 재미있어서 개봉 당시 이 장면을 친구분과 흉내내셨다고 하네요^^ㅎㅎ 줄자샘의 magma를 보여드리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덕분에 ‘미니미’의 원조랄까 기원(?)도 알게된 알찬 시간이었습니다.




절차탁마 in 그루


이번 주 절차탁마는 하루 어머님 근영샘의 그루에서 했습니다. 같이 공부하고 싶은지 책상 밑에 드러누워서 앉아 경청하는 하루와 함께 두 친구의 글을 읽고 토론을 했습니다.



어째 몸이 더 커졌더라고요. 덕분에 얼굴이 훨씬 작아졌습니다(?)


이번 주 발제를 맡은 두 친구 모두 카디라바니야 레바따 장로님의 게송을 선택했는데요. 카다라바니야 레바따 장로님은 출가한 후 그 누구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의 친구이자 모두의 동료이고” “모든 존재를 애민히 여기는 자”로서 자애의 마음을 닦기 때문입니다.

이에 윤하는 어떻게 모든 존재를 애민히 여기고,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는데요. 이를테면 폭력을 가한 사람을 불쌍하고 가엾게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분노와 증오를 느끼죠.

도대체 자애의 마음이 어떤 것이기에 모두를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요? 윤하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살펴봅니다. 사무량심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인데요. 모든 존재를 차별없이 사랑하는 ‘자애의 삶’,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연민하여 그것을 덜어주려는 ‘연민의 삶’, 다른 사람의 기쁨을 바라는 ‘기쁨의 삶’, 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평정의 삶’(주석 1609)입니다.

여기서 윤하가 주목한 것은 자애의 마음은 “존재의 고통과 즐거움에 집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폭력을 당하는 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 또한 “깨닫지 못한 뭇삶”들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무엇이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지 모른채 탐진치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죠.

이렇게 “모든 존재의 괴로움에 집중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들은 “그 고통의 호소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폭력을 가하는 자 또한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며, 그의 폭력적인 행위 또한 “고통의 호소”인 것이죠. 그렇다면면 우리가 평소 악하다고 여기는 자를 보며 분노를 일으키는 대신 애민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죠. 그리고 “그가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정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애의 마음으로 모든 존재를 친구로 여기고 또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굴복할 적이 없고, 분노할 적”도 없습니다. “동요 없는 바위산” 같아지는 것이죠.


근영 샘께서는 질문이 구체적이었는데 답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라는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질문은 “폭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를 자애의 마음으로 대한다면 그의 폭력에 당하고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디라바니야 레바따 장로님은 출가한 후 “‘이들 뭇삶들은 죽어야 한다. 도살되어야 한다. 고통을 겪어야 한다.’라는 사유”가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폭력적인 마음이죠. 폭력적인 마음은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고 죽이려는 마음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의 마음이 이와 같겠죠. 이 전제군주의 마음은 어떨까요? 행복할까요? 자신의 마음대로 사람들을 휘두르니 마음이 편할까요?

무언가를 얻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거나,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기쁘게 할 생각, 살릴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번뇌로 가득한 산만한 마음은 폭력적이게 되기 마련이죠. 그렇다면 전제군주의 마음도 탐진치로 인한 각종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결코 평안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산만한 마음이 악한 행위를 하게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전제군주의 폭력적인 행위를 멈추려면 그의 행위를 막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행위가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의 산란함이기 때문입니다. 카디라바니야 레바따 장로님이 “흔들림 없고, 동요 없는 마음”을 강조하신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자애의 마음에 대해서도 정리가 되는데요. 자애로운 마음은 모든 존재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 기쁘게 하고 살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흔들림 없고 동요 없는 “바위산”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무엇이 진정한 기쁨인지, 무엇이 그를 살리는 일인지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하겠죠^^


윤하에게 계속 발을 뻗친 하루. 물릴뻔함주의


호정이는 자애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잘 실천하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는데요. 이는 곧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으며 이는 “애초에 그 앎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애를 실천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했고, “흔들림 없고, 동요 없는 마음을 기뻐”하는 것이 그 답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근영 샘께서는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자애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는 이유를 이미 호정이가 자애를 왜 실천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앞서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왜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자애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요. 그러니까 이번 글은 자애가 무엇인지, 왜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가 됐어야 하는 것이죠.

근영 샘께서는 우리가 아는 도덕적 가치가 불교에서는 결론이라고 하셨는데요. 자애를 비롯하여 우리가 선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왜 실천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실천해야 한다는 결론만 따르려니 어렵고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애의 마음은 앞서도 말씀드렸듯 모든 존재를 애민히 여기고 친구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즉, 적이 없는 겁니다. 적이 없다는 것은 두려운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고요. 누군가를 적으로 여기는 마음은 나를 해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해침을 당할 무언가, 곧 지키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래서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해침을 당할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해치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겠죠. 그렇다면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두려움과 폭력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 무엇보다도 지켜야 할 ‘나’라는 게 없음을 이해하는 것(실체적인 나)이 중요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을 “하느님의 삶을 닦는” 것에 비유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삶’이라고 하면 전지전능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삶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하느님의 삶이 곧 자애로운 마음을 품은 삶이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삶도 닦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애로운 마음을 닦아 품는다면 누구든 하느님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거죠.

근영 샘께서는 불교에서 쓰는 표현들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다고 하시면서 불교의 이런 ‘깨알^^’ 표현에 주목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욕망을 숲이나 늪으로 비유한다든가, 갈애-집착을 올가미에, 감각적 쾌락과 같은 욕망을 거센 흐름에, 해탈을 그 거센 흐름을 건너 저 피안에 도달하는 것에 비유하는 등등 말이죠.



산책

수업을 마치고 근영샘께서 맛난 저녁을 사주셨는데요. 그 유명한 중국에서 먹는 것 같은 중국집 요리를 저희도 맛보았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배울지니 유쾌할지니'의 '백미토크' 예고편을 >> https://youtu.be/hThYPk4TM90 )


푸짐. 개인적으로 고수범벅이었던 요리가 정말 맛있었어요

'맛있다', '중국에서 먹는 것 같다'를 연발하며 정말 맛있게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종묘까지 구름다리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중간에 타자기가 있는 특이한 공간을 만났는데요.

타자기를 처음 쳐 보는 친구들이 무척 신기해하고 좋아했어요.


달팽이에게 타자기 사용법을 알려주시는 근영샘


멀리서 종묘를 바라보고 돌아왔습니다.

종묘를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셨어요.


구름다리는 세운상가에서부터 대림상가(진양상가는 공사를 하다가 중단했습니다)까지 이어져있는데요.

주변에 이렇게 철거중인 곳이 많았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보존하기로 했던 세운상가도 철거한다고 하네요.

시민들과 함께 재생프로젝트도 하면서 보존하기 위해 많은 실험과 시도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많은 시간이 켜켜이 담겨있는 장소가 사라지는 것도,

보존하고자 했던 노력들이 무색해지는 것도아쉽습니다.


마지막은 마치 원래 저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상콤한 미솔이 사진으로^^!

다음주에는 (아마도) 자연의 후기로 찾아올게요

유쾌하고 재미있는 글을 쓰는 그날까지

청글리의 절차탁마는 계속(되야할 것 같...)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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