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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강감찬 청년고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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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청년학교 1학기_2주차 후기(토요반, 2조)

게시물 정보

작성자 미죠리 작성일23-03-20 12:51 조회85회 댓글2건

본문


이우샘의 후기입니다^^

(컴퓨터 오작동 때문인지 후기가 올려지지 않아, 대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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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30 청년학교 토요반 2주차 후기입니다.


이번 시간은 저번 수업에 이어 니체와 장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에는 후기를 쓰게 되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귀를 열고 선생님들 말씀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해서인지 오히려 수업이 어려웠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후기는 제가 잘 이해한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도 저번 주와 같이 문성환 선생님의 장자 강의를 먼저 들었습니다. 저번에는 곤과 붕의 이야기, 그리고 숙과 홀, 혼돈의 이야기만 다뤘는데 이번에는 뭔가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게 가장 다가왔던 이야기는 조삼모사 이야기였습니다.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저공이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겠다고 말하자 원숭이들은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저공은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했고, 원숭이들이 만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온 사자성어가 바로 조삼모사입니다. 저는 여태껏 조삼모사가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겠지만, 문성환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주셨습니다. 저공이란 사람은, 처음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는 방식을 원숭이에게 제시합니다. 하지만 원숭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마음을 바꾸고 원숭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바꿔줍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처음부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만을 내세우는 존재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모든 존재는 모두 다른 기반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에게 좋다는 것을 행해도 안 되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을 행해도 안 됩니다. 내가 좋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당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참 이기적인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저번 시간과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숙(남쪽의 임금)과 홀(북쪽의 임금)은 혼돈에게 아주 잘 대접받습니다. 숙과 홀은 각각 남쪽과 북쪽의 왕으로, (아마) 취향이 매우 다를 것인데 둘 다 혼돈의 대접에 매우 만족해합니다. 이는 혼돈이 자신에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숙과 홀에게 행하지 않고,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대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숙과 홀은 이에 대한 감사 인사로 혼돈에게 7개의 구멍을 뚫어주기로 합니다. 모두에게는 있는 구멍이 혼돈에게만 없었기 때문입니다. 숙과 홀은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며 하루에 하나씩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지만, 결국 혼돈은 너무 많은 구멍이 생겨 죽고 맙니다. 이 부분에서 나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는 좋은 것이 아니고, 어쩌면 너무 너무 싫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혼돈은 구멍이 7개가 뚫리고 죽을 때까지 참았을까요? 미스테리입니다. 혼돈처럼 좋은 분이 돌아가셔서 안타깝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계보학, 족보를 따지고 그 기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의 가치를 다시 한번 물어보는 것, 말하자면 비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수영 선생님은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철학이 망치로 하는 철학이라고 하셨습니다. 망치로 조각하며 이상적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찾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니체가 생각한 인간이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냐고요? 흠, 그것이 이번에 이야기한 내용인 듯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기독교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어쩌다가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이수영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왜 그 마음이 답답하고, 짜증 나고 그런 것들 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고통이 찾아왔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종교를 찾는 것이 도덕적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고통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이수영 선생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노동'입니다. 무식하게 몸을 움직여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잠시 잊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금욕'입니다. 고통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말하자면 수도승처럼 사는 방식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방식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굉장히 좋은 말로 들리지만, 이 맥락에서는 연민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웃, 남을 도우면서 나 자신에 우월감을 느끼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고통이 해소되었다면 아마 사람들이 종교에 의존하며 신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처리하는 것이 급급했기에 신에게 의존하며 고통을 해소하려고 했고, 그것이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 계기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왜 하필 유일신일까요? 예전에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다른 신화들을 보면 여러 분야를 다루는 여러 신들이 있습니다. 다른 신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신이 한 명(??)만 남게 됐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고통을 해소하려고 신을 찾는다면, 귀찮게 여러 신을 찾아가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고통이 해소되기만 하면 되니 어떤 신이든 한 번에 몰아서 기도할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유일신이 자리 잡지 않았을까요,,?


그다음으로는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지만.. 제 필기를 다시 봐도 어떻게 정리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이만 어정쩡하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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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옥윤지님의 댓글

옥윤지 작성일

ㄴ 동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를 찌르는 기독교에 대한 일침!!
유머가 넘치는 2030이군요

김성필님의 댓글

김성필 작성일

'혼돈은 왜 죽을 때 까지 참았을까?', '여러 신을 찾아가기에 너무 귀찮아서 유일신을 창조한 건 아닐까?' 등등 허를 찌르는 질문들에 웃음이 터졌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저도 궁금해지는 질문들이네요!
허를 찌르는 질문이 곳곳에 놓여있는, 재미난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