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간은 ‘아인슈타인’이었는데요. 근영쌤께서는 수업 전에 각자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1분 과학’ 유튜브를 구독하고 있고, 평소에도 평행우주 & 다중우주론 등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어서 검색해 보곤 했었는데, 그때 아인슈타인에 대해 나름 충격? 적이었던 사실은 ‘아인슈타인처럼 훌륭한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인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딴지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근영쌤께서는 "아인슈타인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에 양자역학이 아주 발전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너무나도 훌륭한 적이었다. 양자역학을 하는 물리학자들조차도 사유하지 못하는 세계들을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는 훌륭한 적이 안내했다. 어떤 것의 성취는 나의 친구만큼이나 아주 훌륭한 적을 필요로 한다. 소인배와 싸우면 소인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적으로 삼았던 니체처럼 말이죠. ㅎㅎ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요즘 청년들은 실패가 두려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면 그것 또한 중요한 것이다. 실패 자체가 좌절은 아니며, 동일한 실패가 아닌 끊임없이 매번 다르게 실패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것이 삶에 대해 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는 걸까?라는 질문해 봐야 한다. 우리는 매번 실패나 잘못을 하며 산다. 그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주 수업 주제가 아인슈타인이 아들에게 해주었던 말인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인데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페달을 발아야,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근영쌤께서는 “혼자 있으면 계속 내 감정을 키워간다. 자기 세계에 갇히면 빠져나올 수 없다. 공동체 안에 있으면 내 감정대로 할 수 없어서 불편하고 어디 숨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여기에 있기 때문에 감정선이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관계성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도담쌤이 해주신 말도 같이 전해주셨습니다. “명리학 상으로도 공동체에 있으면 사주를 덜 탄다. 공동체에는 나에게 부족한 기운들이 항상 많고, 내 기운을 극단적으로 쓰지 않게 된다. 관계가 단절되면 사주를 극단적으로 쓰게 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즉,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 활동을 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세상과 접속의 페달을 밟고 있어야 한다. 페달을 밟는 한 어쨌든 삶은 살아진다."라는 뜻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본인의 삶을 움직이는 추동력은 ‘열정적인 호기심, 우주의 신비로움에 대한 경이로움’이라고 합니다. 근영쌤께서는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타자가 없어진다. 타자를 볼 때, 나를 투사해서 보든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투사해서 본다. 우리는 타자, 낯섦이 주는 경이로움을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간다. 나이가 들면서 타자, 사물이 더 이상 경이롭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경이를 느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나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 주는 신비로움에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밖의 세계로 자기를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온전히 타자를 만나는 경험, 이것이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능력이다. 동물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 밖으로 안 나가려고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영역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화성으로까지 나가려고 하고 있죠. ㅎㅎㅎ) 이처럼 청년기에는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공부와 책을 통해서 이러한 경이로움을 열어주는 시공간에 대한 탐색과 마음을 열어서 과거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경이로움을 느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과학자’라고 하면 삶, 영성, 인격과는 상관없는 전문적 지식인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과학과 영성이 분리가 된 것은 근대 이후라고 합니다. 근대 이후에 자연학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분리되었고, 영성이 종교의 영역으로 가면서 철학도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되었다고 합니다. 근영쌤은 자연학을 공부하면서 자아를 개방해나가는 훈련이 되었고, 인간주의를 넘어서는 즐거움을 느끼셨다고 하는데, 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과학이 영성과 연결될 수 있다니! 실제로 자기 삶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면에 있어서 과학적인 앎이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데,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면에 있어서 자연과의 접속이 탁월했다는 것을 수업자료인 아인슈타인의 책 <상대성 이론 / 나의 인생관>의 “내가 믿는 것” 부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던 과학자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부수어주는 글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관례적 의미로 성공을 최대 목표로 가르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성공한 사람이란 그가 동료들에게 행한 봉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동료들에게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눠준 것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안락과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한 적인 단 한 번도 없고, 같이 공부하는 친구와 함께 자연의 이치에 가닿는 진리 탐구를 하는 충만감이 인생의 공허함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곳에 접속하기 전, 삶이 허무하고 우울하고 왜 살지? 이렇게 살아서 뭐 하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이유가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사람이 점점 싫어졌고, 연애 앞에서는 우정도 항상 뒷전이고 결혼식 이후에는 연락 한 번 안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여자들의 우정이 참 가볍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유튜브에서 곰쌤의 강의를 보게 되었고, 곰쌤은 ‘우정’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1학기 근영쌤 수업인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의 리좀, <청년 붓다>, 이번 수업인 아인슈타인 등을 통해 평소 의심과 경계심이 많던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저의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연과의, 타자와의 연결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요즘 시대는 이 세계가 나 말고 수많은 다른 생명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데요. ‘자신(자아, 개체)의 가치와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위에서만 결정된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또 누군가도 나를 위해 존재해 주고 있다. 끊임없이 자기 경계를 열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추동력을 가질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니구나, 자아가 외롭고 두렵고 쓸쓸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훈련을 매번 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