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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선생님들께서 연암의 글은 연암의 마음을 따라가며 읽어야 한다고 노상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씀을 이제 조금 알 거 같습니다.(깨달음은 항상 왜 이리 늦게 올까요?) 맏누이 묘지명은 그냥 소리 내서 읽는 것만으로도 연암의 마음이 전해져 울컥했습니다. 문샘께서는 보여주기, 형상화가 가진 힘이라고 짚어 주셨는데요, 이십 팔 년 전 억지 부리는 동생을 조용히 달래주던 새색시 적 누이의 모습을 연암은 바로 어제인 양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누이를 중년이 넘어 죽음으로 대면하고 보니, 산, 강물, 달...눈길 닿는 곳마다 온통 누이의 모습 뿐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누이 혼인 때 괜히 분탕질을 하며 생떼를 부렸던 여덟 살 연암의 마음도 읽혔는데요, 아마 어린 연암은 왜 자꾸 심술이 나고, 눈물이 나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을 거 같아요. 혼인해서 떠나가는 누이를 향한 애틋했던 마음을 이 묘지명을 쓰면서 연암도 다시 보게 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은 이 대목에서 독자성과 구체성이 가지는 보편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지극히 사적일 수 있는 연암의 글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까지 울림으로 전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독자성에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이런 글이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라는 질문으로 연암 글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는데요. 일반적 격식이 주류였던 사대부 사회에서 연암은 자신의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들 독서 동아리 지도로 유명하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교육청 독서 자료집 제작 일을 극구 사양하시더라고요, 이유는 관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 문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성을 잃고 흐트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암이 정계 진출을 하지 않은 이유에는 연암이 추구했던 글쓰기도 관련이 있다고 짐작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요?
이렇게 연암의 글에는 개인이 각자의 독자성을 가지고 다 살아 있는데요, 이는 3교시 <아미쿠스 모르티스>에 나오는 시스템에 대한 거부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리 호이나키가 주로 비판하는 테크놀로지는 곧 시스템인데, 시스템에는 독자성을 가진 개인이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시스템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시스템으로 접근한다가 대부분의 해결책입니다. 시스템을 잘 구축해서 시행하는 것이 유능함과 통합니다. 시스템 매뉴얼로 접근하면 누가 그 일을 하더라도 실패 확률이 적습니다. 보이는 사실만 가지고 판단하니 고려할 사항이 적어 효율적이며, 쓸데없는 고민이나 갈등, 감정의 소비 등도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최근 학교폭력 문제로 사회가 시끄러운데요. 학교폭력에 대한 대처는 이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교육이 아니라 그저 시스템입니다. 예전에 학교폭력이라는 말이 없을 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위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있었습니다. 보통 아이들끼리 해결이 되거나 그냥 넘어가거나 교사의 심한 꾸중으로 처리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생기고 단위 학교에 위원회가 꾸려지면서, 담임은 있는 사실만 위원회에 전달하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말라는 매뉴얼이 생겼습니다.(그때부터 만들어진 매뉴얼이 지금은 책 한 권입니다.)그래도 그나마 위원회가 학교에 있었을 때는 위원회에서 교육적인 지도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폭력으로 단위 학교 업무가 너무 가중되고, 법원이나 행정기관이 아닌 학교가 내리는 처벌에 자꾸 시비가 생기다 보니, 학교폭력위원회가 교육청 단위로 넘어 갔습니다. 학교는 이제 사안 조사 보고만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사자 아이들을 전혀 모르는 위원들이 보고서에 적힌 사실만으로 처벌을 결정합니다. 말 그대로 더 확실한 시스템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교육청으로 사안이 넘어가면 아이들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화해나 반성, 사과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육청도 업무 폭주라 더 이상은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있습니다. 시스템의 속성상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으니 문제는 늘어만 가고, 자꾸 더 큰 단위의 시스템으로 이동하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학교폭력이 교육청으로 넘어가고 난 뒤 학교에서는 사실 편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편함 뒤에는 아이들의 기본적인 생활지도에 공백이 생기고, 그것이 학교 교육에 어떠한 형태로든 부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호이나키의 지적대로 시스템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학교, 교사도 지도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우 관계는 삶을 가르치는 가장 핵심적인 테마인데, 그 부분을 대면해서 개입하고 지도할 수 있는 장 자체가 차단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근영샘 말씀처럼 이러한 부분도 정색을 하고 일부러 찾아서 훈련을 하고 수행을 해야 하는 건가 싶습니다.
주변 친구들에게 연암집과 호아나키 글을 읽고 참 좋다 하면서도 정리를 못하고 한 주 한 주 지나는 것이 아쉽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후기라도 꼭 남겨보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을 해서 쓰기는 했는데, 역시나 생각과 글 사이는 아득히 멀기만 하네요 ㅎ 샘들 토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