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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아미쿠스 모르티스』를 읽는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몇 주 전 이 책을 처음 접할 때는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책에 등장하는 여러 죽음을 보면서 제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떠올라서겠지요. 특히 요양원에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내하며 그저 수동적으로 죽어가던 호이나키의 아버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제가 그간 보았던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란 단어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금기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근영샘은 우리는 죽음이란 사건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하는, 그래서 죽음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의 수많은 죽음 위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잊게 만듭니다. 이로써 살생이나 폭력을 죄의식 없이 저지를 수가 있게 되었다는 거죠. 그러나 죽음을 값싸게 취급하는 사회는 삶도 값싸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근영샘은 생명계 전체의 의미에서 죽음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새겨볼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십니다.
누군가는 살면서 우리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더군요. 또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사실이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미쿠스 모르티스』는 죽음의 과정 또한 삶의 일부임을, 그래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 자신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해보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7장을 읽으면서 그 답의 힌트를 조금 본 것 같습니다.
이반일리치의 친구였던 다라와 크리스티안은 둘 다 몸에서 작은 혹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둘은 각기 서로 다른 치료법을 선택합니다. 다라는 병원 치료 대신 자기가 속한 공동체 사람들과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공유하고 토론하고는 신부님께 기도를 청합니다. 반면, 크리스티안 교수는 현대의학의 의료시스템에 의지하면서 수술과 일련의 화학 요법 치료를 선택합니다. 이후 다라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편안한 도시의 집을 떠나 대서양 애런 제도의 작은 섬으로 들어갑니다. 이 장소에 살면서 “통찰력과 힘을, 방향과 목표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암이 다른 장기들로 전이되면서 더 많은 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환자’라는 추상화된 존재로서 죽어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만약 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쉽지 않은 대답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망설임 없이 크리스티안처럼 선택하겠죠. 어느 쪽의 선택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기의 죽음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측면인 것 같아요. 7장의 ‘아니오’라는 대답은 우리 자신이 소외되는 테크놀로지 사회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나의 무력감을 허용치 않겠다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내 삶을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나를 향한 외침이라고 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아니오’를 외치기 위해서는, 그리고 ‘테크놀로지에 의한 좀비’로 살지 않으려면, 어떤 지식보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다라의 행동은 맹목적인 신앙심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의논하고 지지해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호이나키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도 이 책의 부제처럼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의 중요성이 아닐까요? 호이나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의 고독은 우리에게 타인과 함께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으로’ 죽을 수 있는 행복을 맞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