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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렌즈를 바꿔 끼는 일
배움이란 무엇인가. 나도 잘 안다. 첫 문장이 읽히는 순간 심각하게 지루해진다는 사실을. 이러한 물음은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참 오래된 질문이다. 물론 닳고 닳은 물음에는 이것을 종결시킬만한 답변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새로운 지식과 교양을 갖추는 일’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사전적 정의다. 누군가는 이러한 정의를 약간 변형해서 ‘세상을 보는 렌즈를 선명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어른들이 무지한 아이에게 낯선 사물들의 일반적인 특징과 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이 우리는 배움을 통해 만물에 대한 지식을 쌓아간다. 그런데 연암의 글을 읽을수록 다시금 상투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배움이 과연 ‘지식을 쌓는 일’일까?
동네 꼬마도 가르침을 줄 수 있다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이란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싫어하는 겁니다.”하였소.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倉?)로 하여금 기가 죽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연암집(중)』, 박지원, 돌베개, 379쪽)
연암에게 글을 배우던 아이이의 투정을 담은 대목이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창힐은 한자를 창제한 인물이다. 글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는 후대로 하여금 세상 보는 눈을 틔워 주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세종에 버금가는 총명한 학자인 셈이다. 대게 학식이 높은 자일수록 창힐과 같은 그 분야의 개척자나 선대 지식인들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두기 쉽다. 그런데 연암은 글 배우기를 싫어하는 이름 모를 동네 꼬맹이가 위대한 인물마저 기죽게 만든다고 ‘감히’ 말한다. 선대 학자를 소환하여 아이의 총명함을 칭찬하다니, 연암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매우 파격적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상당한 명망과 학식을 갖춘 자만이 할 수 있는 칭찬이기도 하다.
그가 아이를 칭찬한 이유는 먹이 묻은 글자는 실제와 다름을 알고 자신의 의사를 명료히 표현했기 때문이겠으나 나는 다른 지점에 주목하고 싶다. 아이가 아무리 글을 익히기 싫은 이유를 잘 웅변한들 그것을 한낱 핑곗거리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연암은 아이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으로 삼는다. 그의 태도는 아이를 계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야만 나올 수 있다.
연암, 알고 있지 않음을 아는 자
술 유酉 부에 졸卒(죽다)의 뜻을 취하면 취醉 자가 되고 생生 자가 붙으면 술 깰 성醒자가 되지요. (중략) 우리들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이 옛사람보다 더하면서, 옛사람이 경계로 남긴 뜻에는 깜깜하니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소. 원컨대 오늘부터 술을 보면 옛사람이 글자 지은 뜻을 생각하고, 다시 옛사람이 만든 술그릇의 이름을 돌아봄이 옳지 않을는지요.
(『연암집(중)』, 박지원, 돌베개, 407쪽)
술을 뜻하는 한문에 새겨진 선조들의 경고를 돌아보는 연암, 그의 깨달음은 글자의 뜻을 안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얻을 수 있다. 연암은 글자 하나조차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리고 글자를 표현한 부수 속에서도 배움을 끌어낸다. 그 당시 사대부에게 한자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글자마다 새겨진 뜻을 살피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자는 부수에 새겨진 의미에 앞서 다른 이야기나 정보를 표현하는데 쓰이는 ‘글자’로서의 정체성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뜻을 간과한 채 쓰는 상투적인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그는 부수의 뜻을 살피고 그것이 검증되고 새겨지기까지 선대들의 삶에서 수많은 실험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배움, 낯설게 보기
다시 배움을 향한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지식은 확고함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상을 확고히 보기 위해서는 ‘특정한 가치로 규정하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대상을 확고히 규정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이상 생각하기를 종결한다. ‘안다’는 착각 속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때 지식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이는 미숙하고 어리석어서 가르쳐야만 하는 대상이 되고 한자는 글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될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지식이 많을수록 간과하게 되는 깨달음이 많아지는 아이러니. 그래서 연암은 당연시되어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살폈다. 당연해 보이는 것들을 새롭게 보기 위해선 낯설게 봐야 한다. 즉, 안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배울 수 있다. 돌아보니 배움에 대한 질문이 오래된 이유를 알겠다. 지금도 ‘지식 쌓는 일’을 배움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