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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자서전 두번째 시간으로 융의 이론을 좀더 친숙하게 접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대강의 아웃라인에 도움이 된 것같습니다.
발제문 발표 전 근영 샘께서 지난 시간 핵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셨습니다. : "융은
인간을 심적 과정으로 봅니다. 즉, 인간을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유식론과 닮아 있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단일하게 보는데, 마음은 단일하지 않으며 복합적입니다. 아울러
지층이 있습니다. 몸이 진화의 지층을 가지고 있듯이 마음도 진화의 지층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의 근본적인 장, 시간 이전의 영혼의 층위에서 말할 수 있는, 어떤 마음, 어떤 개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우주적 마음의 장, 잔디의 뿌리(리좀), 에 근거하여 우리들은 각각의 잔디처럼 개체로 태어나게 됩니다."
여민 샘은 ‘새로운 의사, 융’으로 저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제목으로 각각 발제 하였습니다.
저의 글에 여러 지적과 질문들이 있었는데, 근영샘이 지적하신 핵심
문제는 텍스트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지난 발제와 같은 지적이었습니다. 근영샘은 “왜 우리는 텍스트를 읽을까요? 책이 왜 필요할까요? 우리는 원래 자신의 생각의 틀로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데요, 그 안에서만 생각하면 발전도 없고 기존에서 되새김질만 할 뿐 그 안에서 자신을 강화하고, 자기 확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텍스트란 렌즈를 정밀하게
닦고 깎아서 내 경험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고 하셨습니다.
글을 읽을 때 저의 습관, 나를 투사하고 내 식으로 해석하고 그걸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이번 발제에도 나왔습니다. 또한 맥락을 통해서 인용해야 하는 데 내 생각을
위해 인용문을 인용하다 보니 맥락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거친 일반론이 되어 버렸습니다.
반성하자면 만약 융과 프로이트의 대결로 글을 쓰고 싶고 그에 대해 나와 아들의 관계를 투영하고 싶었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접근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면의 자아에 집중하는 사람을 쓰고 싶었다면 아들과 융의
내면자아에 집중하는 공통점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자아 실현과 지적 진실의 실현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같은 의문을 낳게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간 갈등을 일반화하고 프로이트와 융을 그 대결 구도 안에 우겨 넣음으로 억지를 부렸습니다. 좀더 세밀하게 그 갈등 구조를 파악하고 깊이 있게 그 둘의 차이를 설명하였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여민샘의 글에서는 하나라도 붙잡고 이야기하자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외 부가적으로 몇 가지 질문과 근영 샘의 설명이 있었는데 주요사항 중심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꿈과 집단 무의식
꿈이 집단무의식에 들어갈수록 의식의 관점에서 더욱 모호하다. 꿈은
마음의 레이어, 꿈에 따라 의식과 무의식이 변환을 이룬다. 꿈에
수준이 있다. 지층, 자아에 가까운가, 자기에 더 가까운가, 이는 집단무의 식에 가까울수록 모호성이 크다. 의식층에 가까울수록 그 사람의 개인적 경험이 영향을 준다. 신화적
층에서는 비슷하게 문명권에서 보여진다. 개인적 경험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으나 형식은 같게 된다. 장화홍련전, 신데렐라가 그 예. 관계형식은
동일한데 어떤내용으로 드러나는가는 개인적 문화적 차이가 있다. 각각의 경험안에서 특색을 갖춘다. 무의식의 원형적 형식은 같게 된다.
2. 원형과 앎
우리의 몸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볼 수 없다. 물리학은 이 우주가
원자들의 운동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았다. 죽으면 원자로 흩어진다. 흩어졌다
모이는 게 이 우주의 원리다. 무에서 유가 생기는게 아니라 유에서 유로 창조 되는 것이다. 물질이 그렇듯이 마음 또한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없던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논리적 공백이 생기게 된다. 현대물리학은 정보들의 세계, 즉 우주에는 어떤 앎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어떤 앎들이 조합하면
인간, 개, 돼지로 된다.
우리 안에도 개, 돼지가 있어 그 순간도 있다. 이는
불교의 유식론과 같다. 어떤 앎의 체계를 갖는다는 것, 그
안에서 관계성을 갖는 것, 그 존재 안에서 우리는 이야기한다. 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그것이 우주적으로 뭉치면 어떤 존재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집단적 무의 식은
앎이고 마음은 앎의 체계이다.
3. 깨달음은 보편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무의식의 원형은 보편적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현실 속에서, 관계속에서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융의 개성화
작업은 보편성을 말한다. 불교에서도 깨달은 자가 자기언어를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깨달음의 끝을 언어화 할 수 있는가? 보편적 소통의
관계로 자기가 소화하는 단계로 가야 깨달었다고 할 수 있다.
4. 융과 프로이트 꿈에 대한 해석 다른 점
프로이트: 꿈에 나오는 상징을 기호화, 꿈의 표상이 ‘이미지가 어떤 의미로 결정 되어있는가?’로 봄, 예) 지갑: 여성의 성기 이미지가 실체적으로 결정됨. 모두 기호화
융: 꿈의 맥락과 개인적 경험위에 의미가 출현함. 꿈의 어떤 의미와 이미지는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음. 꿈은 그
환자의 개인적 경험의 맥락이고 기호가 아닌 상징이라고 봄. 따라서 환자 본인이 자신의 맥락을 잘 알고
있기에 이에 대한 소통이 중요함. 반드시 환자의 삶과 경험과 맥락을 이해해야 함. 초기에 그는 콤플렉스, 연상기법,
개인적 무의식에 프로이트와 연결되었으나 후반부에 그것을 넘어 집단 무의식에 연결됨
5, 전문가 권력에 대한 부분
치료는 권력적 의사, 집단권력, 권력에
대한 지점으로 환자를 대상화한다. 그
곳에서 의사 자신이 소외된다. 의사는 그 병을 밖에서 볼 뿐, 환자와
자신을 분석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이는 선생님은 어떻게 가르치는 데 집중하지 ‘어떻게 배울까’를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의사는 그 병안에서 무엇을 배울까를 보지 않는다. 환자, 의사 모두 병 밖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