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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NS 8주차 후기 입니다. 후기가 늦어졌네요...죄송합니다. 분명 8주차 수업 다음 날부터 조금씩 조금씩 쓰기 시작했는데, 무려 에세이 후기보다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ㅠㅠ 아인슈타인 선생님으로부터 상대적 세계에서는 운동 속도에 따라 시공간은 물론이고 사건의 순서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으므로...후기도 순서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주시기를...
8주차에는 기쁘게도 아인슈타인의 <나의 인생관>과 스피노자의 <에티카> 1부를 끝까지 마쳤습니다! 와아아(짝짝짝)! 마지막 수업이다 보니 한 학기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지난 8주 동안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를 배우며 가장 크게 받은 느낌은 역시 경이로움이 아닐까 합니다.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를 통해 보게 되는 세계는 참 낯설고, 이상하고, 오묘한 것이었거든요.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지만 ‘태양에 대해’ 약 107,000km/h로 운동하고 있다는 것도, 운동에 따라서 시공간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것도, 우리는 모두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양태’이지만, 무언가를 산출하는 원인으로서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 등등.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 모두 제가 지각하고 감각하는 세계와 전혀 다른 모습을 펼쳐 보여줘서 너무 신기했더랬죠.
가장 놀랍고 경이로웠던 건 ‘인간’이었습니다. 지성을 통해 인간의 지각과 감각을 넘어서 세계를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다니! 물론 한계도, 오류도 있겠지만, 나라는 개체를 넘어설 수 있는 지성의 힘에 새삼 감탄하게 됐던 8주였습니다.
사실 이 보다 더 경이로왔던 것은 저희가 나누는 대화에 엄청난 말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관성계’라든지, ‘등속직선운동’, ‘양태’, ‘실체’ ‘무한’같은 말들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됐거든요.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요?
우주의 조화를 경외하는 독행자
말년에 가까워졌을 때 아인슈타인은 클리블랜드의 의사들에게 했던 연설에서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의 개념적 대상과 그런 대상들에게 주어지는 법칙과 같은 관계로 연결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월터 아이작슨,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 이덕환 옮김, 까치, 544쪽).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믿음은 그의 과학적 견해와 종교적 견해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평생에 걸친 연구는 서로 다른 영역의 상호작용을 밝히고, 하나로 연결하고자 한 노력이었죠. 특수상대성 이론은 모순이라고 여겨졌던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에서 비롯되고 후에 뉴턴역학으로 발전한 ‘속도는 항상 상대적이다’라는 것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에서 밝혀진 ‘빛의 속도는 절대적이다’라는 것을 결합한 것입니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연구는 중력과 전자기장, 그리고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통일장 이론’이었죠.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아인슈타인이 느꼈던 이 경이로움의 정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완전한 무작위성보다 우리의 인식을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주는 법칙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해가 뜨고 지는 것, 책상을 밀면 책상이 밀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놀라움을 느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을 때, 평소 알고 있던 인과와 다른 인과가 펼쳐질 때죠.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놀라워했던 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매번 동일하게 일어나는 사건의 패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주 전체가 따르는 질서가 있다고 했을 때 오차 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의 기계, 똑같은 옷을 입고 동일한 박자와 걸음으로 척척 걸어가는 군인들의 대열을 떠올리게 됩니다. 생명력, 역동성 같은 건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죽어있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질서의 이미지 말이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우주 전체의 질서와 조화를 말했을 때 ‘우주가 군대나 기계 같다고? 여기서 어떻게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가장 싫어했던 게 바로 이 군대문화였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군대 문화와 이를 긍정하는 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합니다^^;; “집단 생활의 가장 쓸모없는 형태로서 내가 혐오하는 군대 문제로 화제를 넘길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밴드의 선율에 마주처 4열 종대로 행진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맛본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를 경멸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큼직한 두뇌를 갖게 되었다면 이는 오로지 실수 때문이다. 그에겐 보호막 없는 척수만 있어도 될 것이다”) 개인(개체)의 자유, 독립성, 자율성, 창의성을 중시했죠. 아인슈타인이 쓴 글들을 모아둔 『상대성 이론 / 나의 인생관』이라는 책을 보면 곳곳에서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 덕분이며, 따라서 공동체를 위해 살아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꼭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지곤 했습니다. 연결된 전체와 개인의 자유는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는 왜 모순처럼 느껴질까요? 전체의 부분이라고 하면 전체에 종속, 예속된 존재라는 생각이 들죠. 그럴 때 개체의 자유, 독립성, 자율성은 억압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우리가 자유를 아무런 외부적 구속이 없는 일종의 진공상태 같은 이미지로 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존재도 외부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주 최소한의 생활을 한다고 해도 숨 쉴 공기가 필요하고,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필요하죠. 진공 속 자유는 환상이자 망상인 겁니다. 그래서 근영 샘께서는 구속의 유무가 아니라 어떤 구속인가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존재한다는 게 어떤 구속 상태에 있는 거라면 자유는 없는 걸까요? 연결성 위에서 자유가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요?
근영 샘께선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바로 ‘전체’, 그리고 ‘개체(개인)’입니다. 먼저 연결성을 제외한 어떤 전체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연결성 너머에 전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개인, 개체는 실체화된 전체를 위해 활동하는 부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요. 사실 연구실에 와서 선생님들께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연구실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남산강학원’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구성하고 있는 그 자체가 남산강학원이라는 말씀을 자주 해 주셨었죠. 제가 후기를 쓰고 있는 프로그램 ‘SNS 스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SNS 스쿨’이라는 전체가 있고, 여기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근영 샘께서는 반대라고 하셨어요. 강의를 해주시는 근영 샘과 수영 샘, 그리고 매니저 미솔과 같이 공부하는 민주, 연희 샘, 순영 샘, 하늘, 줄자 샘, 지영, 제가 연결되어 있는 그 자체가 바로 SNS 스쿨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만 빠져도 완전히 다른 전체가 된다고 하시면서요. 그런데도 이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잘 와 닿지 않았더랬죠. 제가 없어도 남산강학원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물론 선생님들이 안 계시는 건 좀 다르게 느껴지긴 합니다^^;)
제가 이 주제로 에세이를 썼지만, 역시 풀리지 않았었는데요. 근영 샘께서 그럼 도대체 네가 구속되어 있는 ‘전체’라는 게 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제야 정말 ‘전체’가 굉장히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미지구나, 그런 게 따로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결된 그 자체 말고 다른 실체적인 전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도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영 샘께선 자아의 고유성과 개체의 독특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먼저 ‘자아’는 그 존재만이 가진 고유한 속성을 뜻합니다. ‘고유성’을 영어로는 ‘property’라고 하는데요. 여기에는 ‘재산’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재산은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아니죠. 즉 ‘자아’란 ‘그 개체만이 가진 재산(고유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 ‘개체’는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면 각각이 모두 동일한, 구분이 되지 않는 집단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 같은 것이죠. 전자나 바둑알을 떠올려보면 되겠습니다. 근영 샘께서 예를 들어주신 바둑알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바둑알은 하나하나 따로 놓고 보면 모두 동일합니다. 그런데 바둑알들이 연결되어 집을 만드는 순간 어떻게 될까요? 바둑알 각각은 다른 바둑알과의 관계 위에서 자기만의 역할과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만 빠져도 연결성이 달라지고 심지어 집이 무너지기도(?)합니다. 이때 바둑알들은 독특성(singularity)을 갖게 됩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공동체의 개인들을 바둑돌처럼 느끼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겐 각각이 고유성을 가진 개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성 위에서 저 사람이 저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특이성으로 공동체의 멤버들을 보게 되면 저 친구가 저런 모습인 것은 저 친구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관계가 저 친구를 지금의 모습이게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이렇게 말하면 잘 와 닿지 않지만, ‘어머니’를 떠올려 보면 어떤가요? 어머니는 ‘아이’와의 관계 위에서만 어머니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또한 지금 제가 맺고 있는 연결성 없이 관계없이 지금의 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이제 앞에서 말한 연결된 전체라는 말도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바둑알들이 연결되어 매번 다르지만 온전한 집(전체)을 만드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와 세계가 맺는 관계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어쩌면 지금 연결되어 있는 전체, 연결성에서 비롯된 나의 독특성 말고 다른 세계, 가능성을 떠올리기 때문에 지금이 부자유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인슈타인이 <내가 믿는 것>이라는 에세이에서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는데요. 후기를 쓰면서 이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처음 읽을 때와 굉장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등속직선운동의 비애(?) : 나만 빼고 여유롭고 날씬해!
지난 주에는 각각의 운동상태에 따라 시공간이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달라지는 걸까요?
지난 시간에 ‘등속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관성계의 경험은 ‘정지’상태와 같다고 배웠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6주차 민주의 후기를 참고해주세요 :)
즉, 아무리 빠르게 운동하고 있다고 해도, 등속직선운동을 하고 있다면 자신이 정지해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때 자신의 운동상태(존재감)을 느끼는 방법은 ‘다른 관성계와의 비교’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 비교는 늘 다른 사람이 더 좋아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야심찬(?) 그림과 함께 설명해보겠습니다(그림 그려보고 싶었어요...).
영희가 플랫폼에 서서 철수가 탄 기차를 보고 있습니다. 이 기차는 특수 제작된 투명한 기차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이때 영희는 ‘지구에 대해’ 속도가 0km/s인 상태라고 해보죠. 두 사람은 같은 광시계를 가지고 있는데요. 이 빛 시계는 위아래에 거울이 달려있고, 빛을 쏴서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입니다. 두 사람의 시계는 똑같이 흐르도록 맞춰져 있고요(빛의 속도는 일정하고, 절대적이므로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모르시겠으면 찾아와주세요. 다시 그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영희는 이상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광시계가 ‘똑,딱’하고 제자리에서 빛이 위로 갔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 철수의 광시계 빛은 ‘또오옥-따아악’하고 더 먼 거리를 이동하기 때문이죠. 시계는 분명 똑같이 맞춰두었습니다. 그런데 영희에게는 움직이고 있는 기차를 탄 철수의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철수의 입장에서 움직이는 것은 영희라는 겁니다(지구도 엄청난 속도로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 말은 철수의 입장에서 보면 영희의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른다는 말이 됩니다. 아니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이렇게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것을 ‘시간 지연(time dilation)’이라고 하는데요. 등속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관성계에서는 모두 자신이 ‘정지해있다’고 느끼므로, 다른 관성계의 시간이 늘 느리게 흐른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빨리 달리고 있다고 해도요!
등속직선운동을 할 때는 상대방(다른 관성계의)이 여유로워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씬해 보이기까지 하죠! 이번에는 철수가 탄 기차의 길이를 재보겠습니다.
길이를 재려면 물체의 끝과 끝을 자를 사용해 재야합니다. 철수가 탄 기차의 길이를 재기 위해 영희가 자를 들고 기차의 머리 부분에 가져다 뒀는데요.
그런데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철수가 탄 기차는 달리고 있었죠! 영희가 기차의 앞부분을 재고 끝을 재려는 순간, 기차가 이동을 합니다. 기차가 정지해있을 때보다 길이가 줄어들 게 되겠죠! 이를 ‘길이 수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등속직선운동을 할 때는 아무리 빨라도 정지상태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 거지?(나의 존재감)를 알려면 다른 관성계와 비교를 할 수 밖에 없죠.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비교를 하면 내가 얼마나 빠르게 달리고 있건 다른 관성계에 있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이고, 날씬해 보인다는 겁니다! (물론 일상에서 우리의 감각으로는 시간 지연과 길이 수축을 느낄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빛에 가까운 속도로 빨라야 한다고^^)
어떤가요? 저는 강의를 들으면서 물리학이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늘 같은 방향을 향해 질주하지만, 권태로움을 느끼죠. 그래서 남들과 비교 속에서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문제는 비교는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결론은 오늘부터 원운동을 합시다! 입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기다려지네요. 두근두근.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각각의 운동 상태에 따라 시공간이 달라진다면, 사건의 순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7주차 하늘의 후기를 참고해주세요^^). 이는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 시간과 순서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인데요. 이것은 제가 설명하기 보다는 아인슈타인 박사님의 설명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 인용문은 아인슈타인이 학생들을 위해 특수상대성 이론을 쉽게 설명한 것인데요. 저는 그동안 말로만 듣던(?) 아인슈타인에게 직접 상대성 이론 설명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철롯둑을 기준으로 살펴봤을 때), 이 관찰자는 A에서 뻗어나오는 광선에 앞서서 B에서 뻗어나오고 있는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관찰자는 A에서 뻗어나오는 빛의 광선보다는 B에서 뻗어나오는 광선을 먼저 보게 될 것이다. 즉, 기차에 타고 있는 관찰자들은 달리는 기차를 기준체로 삼고 있기 때문에 A보다는 B에서 먼저 번개가 쳤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결과에 다다르게 된다.
철롯둑을 기준으로 했을 때 동시에 발생한 사건들은 기차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동시에 발생하지 않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동시성의 상대성). 기준체(좌표계)는 자신만의 특별한 시간을 갖는다. 그래서 만약 시간에 대한 서술을 했을 때 그 시간의 기준체가 무엇인지 지정하지 않았다면 사건의 시간에 대한 서술을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기 전 물리학에서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시간에 대한 언급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기준체의 운동 상태와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동시성에 대한 정의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이 가정을 포기한다면, 진공에서의 빛의 전파에 관한 법칙과 상대성 원리 사이의 모순은 없을 것이다.(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나의 인생관』, 최규남 옮김, 동문사, 159쪽)
2교시 <에티카>시간에는 1부 정리 33 증명부터 1부 끝까지 읽었는데요. 아인슈타인 후기를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 스피노자는 다시 복습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됐습니다... 복습하고 후기를 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