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기획 연재

기획 연재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할 수 있는 원리, 충(忠) | 공자, 『논어』

게시물 정보

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5-06 19:37 조회439회 댓글0건

본문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할 수 있는 원리, 충(忠)




문 빈 (글쓰기학교 고전평론반)


子曰 :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남의 장점을 북돋고, 남의 단점은 북돋지(돋우지) 않는다. 소인은 그 반대로 행한다.”

공자, 박성규 역주, 『논어집주』 (12편 안연), 소나무 출판사, pg.493


공자는 군자에 대하여 설명한다. “군자는 남의 장점을 북돋고, 남의 단점은 북돋지 않는다.” 여기서 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성成에는 ‘북돋는다’와 ‘완성 시킨다’라는 뜻이 있는데, ‘완성 시킨다’로 해석하면 이렇다. “군자는 남의 장점을 완성 시키고, 남의 단점을 완성 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하면서부터 군자의 마음 씀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남의 장점을 완성하는 데까지 마음을 쏟고, 남의 단점은 발현되지 않도록 마음을 쓰는 사람이 바로 군자였다니!


군자의 마음 씀이 느껴지는 순간, 군자를 비전으로 삼은 공자도 다시금 보이기 시작했다. 안연, 자로, 자공, 자장과 같은 제자들을 향해 칭찬하기도 하고, 때론 호통치기도 하고, 같은 조언을 반복해서 하는 공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말을 하고 있던 공자의 마음에는 제자들의 장점이 완성되기를, 그리고 단점은 제어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소인은 그 반대로 한다.” 소인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막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완성 시키려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보통 소인과 같은 마음일 때가 많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질투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은 나와 상관없다며 무관심하다. 이와 달리 군자는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 사람을 완성 시켜주려 한다. 이런 군자의 모습이 멋있고 궁금했다. 그렇다면 군자는 어떻게 다른 존재를 완성 시키려는 데까지 마음을 낼 수 있었던 걸까?



남을 위해 자기 마음을 다하는, 충(忠)


자공이 공자께 물었다. “벗이란 무엇입니까?”

“충심으로 일깨우고 완곡하게 이끌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그만둔다. 그러면 자신에게 욕이 되지 않는다.”

같은 책(12편 안연), pg.493


나는 자공과 공자의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우선 자공은 어떤 인물일까? 자공은 ‘비교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다. 얼마나 비교를 하고 다녔던지, 한 번은 공자에게 크게 혼쭐이 난다. “자공은 현명한가 보다. 나는 그럴 겨를이 없다.” 2m 거구의 스승, 공자가 ‘너는 참 시간이 많구나^^’라며 주의를 준 것이다. 게다가 자공은 ‘인정 욕망’까지 강한 캐릭터다. 어느 날은 공자가 제자 자천을 군자답다고 칭찬했는데, 자공은 옆에서 그걸 듣고는 기회를 틈타 묻는다. “저는 어떻습니까?”라고. 자신도 어서 칭찬해달라는 것이다.


남과 남, 남과 자신을 비교 평가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자공은 마음속에 사람들이 자신보다 잘 나가는 것에 대한 경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석에는 자공이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좋아”하는 인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 자공이 벗에 관해 묻자, 공자는 충심(忠)으로 일깨우고 완곡하게 이끄는 게 벗이라는 이야기해준다.


여기서 충(忠)이란 무엇일까? 충은 “남을 위해 도모하면서 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는 것”이다. 가령 어떤 길에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고, 또 그 길로 가선 안 된다고 느끼고 있다. 그때 누군가 그 길을 가려 하면 마치 내 일처럼 끝까지 막는 것이 ‘충’이다. 반대로 가도 되고, 안 가도 된다고 미적지근하게 말하는 것은 ‘불충’한 것이다.



공자는 자공에게 상대를 위할 때는 마치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마음을 “털끝만한 미진함도 없이” 다 쓰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좋아”하면서 그들이 못난 상태로 있기를 바라고, 상대를 위한 마음을 잘 내지 않는 자공을 꼬집는 말이었다. 공자는 무서운 얼굴로 자공을 압박했을지 모른다. ‘지금 네가 하는 행태는 벗을 사귀고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말이다.


나는 군자가 다른 존재를 완성 시키려는 데까지 마음을 낼 수 있는 이유를 충(忠)에서 찾았다. 상대에게 장점이 보이면 그것이 마치 내가 가진 장점처럼 완성 시켜주려 하고, 단점이 보이면 내가 가진 단점처럼 발현되지 않도록 마음을 끝까지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충으로 상대를 대하는 일이 군자에게는 왜 기쁜 일이었을까? 군자에게 어떤 비전이 있었기에 충은 기쁜 일이었을까?



화합(和)으로 가는 길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화합을 추구하고 뇌동하지 않지만, 소인은 뇌동할 뿐 화합하지 않는다.”

같은 책(13편 자로), pg.539


공자는 군자가 바라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군자는 화합을 추구하고 뇌동하지 않지만, 소인은 뇌동할 뿐 화합하지 않는다.” 여기서 화합(和)은 국을 끓이는 것에 비유된다. 국을 끓이려면 “물, 불, 식초, 젓갈, 소금, 매실 등” 다양한 재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을 끓이는 동안 간을 맞추며 부족한 것은 더 넣고, 지나친 것은 묽게 해야 한다. 이것이 화합(和)의 모습이다. 반면에 뇌동(同)은 물에 물을 타는 것에 비유된다. 물에 물을 타면 아무런 변화가 없다.


소인은 뇌동(同)할 뿐이라고 말한다. 소인은 “물에 물을” 타듯 상대에게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관계 맺는 것을 뜻한다. 소인은 서로 아첨하고 동조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충(忠)이 생략됐다. 단지, 나와 성향이 비슷하고,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 오는 편안함만 있을 뿐이다.


반대로 군자는 화합(和)을 추구한다. 화합하는 모습은 공자의 공동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나이, 돈벌이, 외모, 사는 지역도 모두 제각각인 사람들이 한 데 모여 강학을 한다. 공자는 제자들의 개성을 부정하지 않고, 각자가 타고난 기질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국을 끓일 때 양념을 하듯 어떤 때는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또 어떤 때는 과도한 면을 덜어주며 상대의 존재가 완성되기를 돕는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를 위하는 것은 공자뿐만이 아니다. 제자들 간에도, 심지어 제자가 스승에게도 행해진다. 이것은 서로 다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서로 다르기에 서로의 부족함과 과도함이 잘 보이고 그것을 채워줄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데에는 상대를 위하는 충(忠)의 원리가 핵심에 있다. 군자는 이런 마음들 속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리고 군자는 충(忠)해야만 화합(和)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군자는 기쁜 마음으로 충 하였다.



그쳐야 할 땐 그쳐야(止)


그렇다고 군자가 매번의 관계에서 충(忠)을 행하는 건 아니다. 다시 자공과의 대화로 돌아와서 보면,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충심으로 일깨우고 완곡하게 이끌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그만둔다. 그러면 자신에게 욕이 되지 않는다.” 공자는 자공이 충을 남용할까 봐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 쓰기를 중단하라는 것이다. 자공으로서는 약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마음을 끝까지 쓰랄 땐 언제고, 이젠 마음을 그치라니! 공자는 왜 충(忠) 하라면서 지(止)를 말하는 걸까? 충과 지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그것은 군자가 악(惡)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맨 처음 인용한 구절 중에 군자는 “남의 단점을 북돋지 않는다(不成人之惡)”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단점(惡)을 악으로, 성(成)을 완성 시키다로 새롭게 해석해보면 이렇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악함을 완성 시키지 않으려는 존재라는 것이다. 군자는 누구에게나 악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악함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다만, 군자는 다른 사람의 악함이 마음속에 무르익어 밖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상대가 “듣지 않는” 경우에 왜 충을 그쳐야 한다고 말할까? “듣지 않는다”는 말은 상대가 나의 충고를 원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계속해서 충고하면 상대에게 미움, 원한, 증오와 같은 악한 마음을 남기게 된다. 여기에서 상대를 위하던 마음이 오히려 상대를 악하게 만들 수 있는, 그래서 상대를 위한 게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경계해야 할 지점이 생긴다.


“사심을 극복하고 예를 실천함(克己復禮)이 인이다. 하루라도 사심을 극복하고 예를 실천한다면, 천하에서 어질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인의 실천은 자기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

같은 책(제12편 안연), pg.461


이처럼 충을 행할 때도 극기(克己)의 지점, 사심을 극복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려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듣지 않는 상대가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겨날 때’가 그렇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두 마음이 생기는 순간 ‘사심’이 떠오른다. ‘사심’은 본래의 마음, 다른 사람을 위하려는 마음을 가려버린다. 그럴 때 사심을 극복하고 그칠(止) 줄 아는 것이 바로 복례, 예로 회복됨이다. 이렇게 사심을 극복하고 그치는 데까지가 온전히 충을 행하는 것이다.



2021. 5. 1. / 글고평 1학기 최종에세이 / 논어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