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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바탕으로 은총을 소망하다 | 단테, 『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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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5-13 19:50 조회2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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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바탕으로 은총을 소망하다



이철수 (글쓰기학교 고전평론반)


『신곡』의 씨앗


스스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특사로 잠시 고향을 떠난 사이, 단테 자신은 인정할 수 없는 죄목으로 자신의 고향에서 추방된다. 돌아올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소식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듣고 매우 황망했으리라.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분명해.’ 이렇게 생각하며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마치 우리가 진실이 건져 올려 지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단테도 귀향을 바라지 않았을까? 멀리 떨어진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단테는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라고 그의 생 후반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겠지만, 단테 입장에서는 그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것이다.



죽음의 목전에까지 갔다가(지옥편 2곡 108행) 다시금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이 작품, 『신곡』을 썼다. 작가 연보에 따르면, 단테가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2년뒤부터 17년에 걸쳐 이 작품을 구상하고 썼다고 한다. 이미 지옥편 1곡에서 연옥과 천국에서 어떤 경험들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고(지옥편 1곡 115~123행), 지옥편이 전체 100곡을 염두에 둔 34곡이란 점을 보면,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시작했다. 당시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던 사후 세계인 지옥, 연옥, 천국을 왜 다시금 살펴보려고 한 것일까?



지옥을 푸는 열쇠, 믿음


지옥의 첫 고리 림보. 여기에 있는 이들은, 딱히 죄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기에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의 첫 고리에 머무른다.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 ‘믿고 안믿고’가 아니라 단지 (기회가 없어) 믿음이 없었던 이들도 지옥으로 향한다는 말이다. 가장 덜 괴로운 곳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지옥이다. 이런 림보에서 시작한 지옥은 주데카에서 끝난다. 주데카에서는 루키페르가 세 명의 죄인을 입에 물고 이빨로 찢는다. 고통받는 세 명은 예수님을 판 유다, 그리고 카이사르를 배반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로, 교회와 제국을 배신한 자들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다. 이렇게 배반한 죄인을 씹는 루키페르도 하느님을 배반해서 악마로 강등되어 버린 전직 천사다. 믿음을 배신한 이들끼리 잘 어울릴 법한데, 하느님을 배반한 천사가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를 벌하는 모습이 역설적이고 가장 지옥답다.


믿음이 없는 자부터 믿음을 저버린 자까지, 지옥은 믿음에 실패한 자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그렇다면, 단테에게 믿음은 무엇일까? 천국에서 만난 베드로에게 믿음에 관한 질문을 받고 믿음을 이렇게 정리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중략) 저에게 관대하게 모습을 드러내는/심오한 것들은 … 단지 믿음 안에서 존재하고, 그 믿음/위에서 높은 소망이 세워집니다./그래서 믿음을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천국편」 24곡 64~75행, 민음사, pg.207


누군가의 주장을 믿기 위해서는 그걸 뒷받침할 어떤 증거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단테가 말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실상이자 증거다. 그러니까, 믿기 위해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믿기 때문에 어떤 증거도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전혀 말이 안되지만, 그게 말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 믿음이다. 한 마디로 ‘믿습니다’라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다고 한다.



소망이 있어 버티는 연옥


믿음에 대한 문제는 왜 중요할까? 개인의 믿음은 천국에 오를 수 있는 자격 요건이 된다. 그리고, 인간의 원죄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써 그 믿음을 증명한다. 자격이 주어진다고 모두 즉시 천국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오르기 위해 참회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시공간으로 연옥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단테는 이 연옥을 일곱 개이 비탈로 세분화했는데, 각각의 비탈에서 각자가 살아서 지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 각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언젠가는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 ‘앞으로 축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기대하는 것(천국편 25곡 67~68행)’을 가지고 망자는 인고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고할 수 있는 힘은 일종의 덕에 해당하는데, ‘모든 덕은 믿음이라는 귀중한 보석 위에 자리를 잡는다(천국편 24곡, 89~90행)’. 이렇듯 ‘소망’은 믿음의 바탕에서만 가질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믿음이 없으면 소망은 있을 수 없다.



작품에서 순례는 지옥, 연옥, 천국을 모두 거친다. 그 중 연옥은 소망을 가지고 거치는 순례 구간이다. 작품이 아닌 인생은 어떨까? 단테가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겪은 일들, 그리고 현세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겪는 일들을 연옥에 겹쳐볼 수는 없을까? 각자가 겪은 혹은 겪는 고초는 하느님께 구원받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 믿는 현실의 모습이, 단테가 작품에서 보여준 연옥에서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단테는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소망을 가지고 임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순례자의 길’의 인물 야고보를 등장시켜 ‘소망’에 대해서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은총을 빛으로 채운 천국


지옥의 끝은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중력이 모이는 지점(지옥편 34곡, 110~111행)’이다. 지옥을 지나 연옥을 지나올 때 순례자는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천국에 오르자마자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중력에서 벗어났’다고(천국편 1곡, 139행) 말해준다. 무게와 중력을 느끼는 것은 참회해야 할 죄가 남아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당시에는 여겨진) 빛은 죄에서 자유로운 혹은 죄사함을 받은 영혼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읽힌다.


하느님의 빛을 바라보기 위해 베아트리체는 베르나르에게 순례자를 맡기고, 베르나르는 또다시 마리아에게 의탁하여 순례자가 하느님의 빛을 보게 한다. 그렇게 본 빛에 대해 기록함에 있어 단테는 ‘말함은 그런 시각(나의 봄[見]) 앞에서는 실패한다(천국편 33곡, 56행)’라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한다. 이제 빛에 대한 기록 끝부분을 보자.


우리의 모습이 그 원에 어떻게 들어맞았는지,/거기서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보고 싶었다.//내 날개는 거기에 오르기에는 너무 약했지만,/내 정신은 그 광휘로 깨어나 원했던 것을 마침내 이루었다.//여기서 나의 환상은 힘을 잃었다. 하지만/내 소망과 의지는 이미, 일정하게/돌아가는 바퀴처럼, 태양과 다른 별들을//움직이시는 사랑이 이끌고 있었다.

같은 책, 「천국편」 33곡 137~145행, 민음사, pg.293


하느님의 섭리가 그렇게도 궁금했지만, 거기에 다다르기에는 너무 미약하다는 것. 하지만, 틀림없이 그러한 섭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이성적인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지옥, 연옥, 천국에 대한 열쇠말로 작품을 마무리를 하고 있다. (‘믿음’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은 없지만, ‘이끌고 있었다’라는 표현이 암묵적으로 믿음에 바탕을 둔 표현을 대체하고 있다.)



실패하는 글쓰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왜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을 다시 살펴볼 생각을 했을까? 단테는 스스로에게 혹은 하느님에게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을 거다. 고향인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니까 말이다. 사후 세계의 구성은 알고 있지만, 어떤 이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신의 뜻대로 행동했다고 믿었는데,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을 보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무엇이 ‘최고의 선’인지, 그에 따른 교리들에 대한 고찰이 필요했을 것이고, 또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그 마음으로 17년에 걸쳐 정리하며 만들어진 작품임을 생각하면, 그 시간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한 치열함이 느껴진다. 어떤 계기였는지 언제였는지 짐작할 수는 없으나, 어느 시점에 깨달음이 왔고, 그 깨달음을 마무리로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써 나갔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단테는 구원을 바라며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지만 작품 안에서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는 단테가 말한 것처럼, 그 깨달음(봄[見])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실패할 운명이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실패할 운명과 궤를 같이 한다[1]. 하지만, 실패할 운명을 가지고도 작품을 씀으로써, 적어도 ‘믿음을 바탕으로 은총을 소망하라’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스스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실패하는 글쓰기는 길을 만들어 낸다. 나는 이 실패가 부럽다.



[1] 만일 언어로 봄을 재현할 수 있다면 어떤 타자가 나의 언어를 통해 빛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되며, 이는 역으로 그 언어를 통해서 스스로 빛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므로 스스로가 구원받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2021. 5. 1. / 글고평 1학기 최종에세이 / 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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