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기획 연재

기획 연재

열반을 믿는 법 | 『밀린다왕문경』

게시물 정보

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7-20 11:48 조회189회 댓글0건

본문



열반을 믿는 법



김해완


“존자 나가세나여! ‘열반, 열반’이라고 당신은 말했는데, 그 열반의 형태라든가 위치, 연수, 분량 등을 비유에 의하여 * 이유에 의해서 * 원인에 의해서 * 또는 방법에 의해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대왕이여! 열반은 그렇게 비유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열반의 형태와 위치, 연수라든가 분량 따위를 비유에 의해서* 이유에 의해서*원인에 의해서 또는 방법에 의해서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밀린다왕문경 2』, 민족사, pg.225


이번에 읽은 『밀린다왕문경 2』 부분에서는 열반에 대한 토론이 자주 나온다. 밀린다왕과 나가세나의 문답을 보면 왕의 질문에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열반에 대해 흥미는 있지만 믿지는 않는다. 열반에 대한 불교의 설명이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가세자가 지금까지 화려한 언변으로 밀린다왕의 기세를 꺾어놓았기 때문에, 왕은 감히 스승 앞에서 ‘열반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열반이 합리성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는지 알고자 한다. 이때의 합리성이란 밀린다왕이 살면서 경험해온 물리적 세계의 법칙이다. 열반의 시간성, 공간성, 형태 및 특징이 우리들가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활용하는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묻고, 그렇지 않다면 열반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위 인용구는 밀린다왕의 이런 경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열반이 마치 사물이나 생물인양 말하고 있다.



나가세나는 열반의 형태, 위치, 분량을 보여줄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열반은 분명히 존재한다고도 말한다. 나가세나가 왕을 설득하는 방식은 명쾌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분명히 일상의 논리로 전부 다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나가세나는 광대한 자연을 예시로 끌어온다. 가령, “대해에는 물이 어느 정도 있”는지, “대해에 서식하는 중생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모른다. (225) 그렇다고 해서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바다 안에 생명체가 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논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땅 끝에서 바다의 모습을 일부 경험하며, 그 생태계에 기대서 생업을 꾸리기까지 한다. 또, 자연에는 “‘빛깔과 형체가 없는 신체를 가진 자’라고 이름하는 신들” 역시 존재한다. (227) 밀린다왕마저 이 신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당시에는 신이 살지 않는 자연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렇다면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은 불교가 아닌 밀린다왕이 아닌가? 결국 밀린다왕은 열반의 “빛깔과 형체”를 알아내지 않는 한 열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자신의 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둘의 문답은 불교 이전에 철학 일반의 논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과 존재의 관계다. 밀린다왕은 인식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상을 낱낱이 알아야만 비로소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밀린다왕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설령 우리의 인식 밖에 ‘신세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능력이 없다면 과연 그 존재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밀린다왕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과학자를 닮았다. 물론 여기서 배울 점도 있다. 밀린다왕은 언제나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입장을 항상 명확히 하기 때문에 반대로 그 입장을 ‘쿨하게’ 떠날 수도 있다. 또한 그는 구체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보를 스스로 소화할 수 있을 때까지 따지는 집요함은 공부할 때 꼭 배워야 할 태도다.


그러나 그의 맹점은 지성이 구성되는 방식이 곧 인식의 한계가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경험지는 자기가 경험한 영역 외에는 무식할 수밖에 없고, 논리는 논리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를 떠나는 순간 무력해진다. 그런데 이처럼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인식을 존재의 근거로 삼아버릴 때, 이는 곧 존재를 한계 짓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한계를 타파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발생한다. 내가 ‘나’라는 사실이, 내가 아는 게 ‘이 세계’ 뿐이라는 게 견딜 수 없을 때 말이다. 편안한 상태로 맛있는 것을 실컷 먹으면서 ‘열반이 무엇인가’를 백날 논증해봤자 열반에 대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결국 열반이 필요한 자는 마음이 괴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 괴로움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절실히 찾는 자다. 밀린다왕 자신조차도 “열반의 특성에 관해서 그 일부분이라도 밝은 이해를 얻”어 “마음의 타는 듯한 괴로움을 불어 꺼서 시원하게” (228)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괴로움을 떠나는 문제에서 열반의 형태, 위치, 분량이 대체 왜 중요한가?



진심으로 열반을 고심하는 사람에게 문제의 초점은 초월로 바뀐다. 나는 나를 떠날 수 있는가? 나는 인식을 떠날 수 있는가? 정말 인식을 떠나는 순간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가? 불교는 그렇다고 말한다. 고(苦)를 떠나려면 공(空)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실과 인식의 지반이 전부 무상하다는 공성을 척도 삼아 세계를 다시 인식해보라는 것이다. “만일 인식 방법이 척도가 아니라면 / 그것으로 측정한 것도 거짓이 아닌가?” (<입보리행론>, 203) 괴로운 자에게 인식 척도는 현실에서는 고통의 정도, 수행에서는 공성의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 역시 독화살에 맞았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행동은 ‘화살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게 아니라 당장 화살을 뽑아서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공성을 이해하는 것과 존재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리고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말해지고 있다.


나가세나가 밀린다왕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열반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열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정의(定義)가 아니라 힘을 보여준 것이다. 나가세나는 밀린다왕이 자기전제를 포기하자 그제야 열반의 수많은 특성을 다양한 일상 사물에 빗대어 아름답게 설명한다. 연꽃, 물, 해독제, 대해, 허공, 봉우리…. 이 모든 비유는 열반이 괴로움을 씻어낸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는 나 역시 수행을 통해 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밀린다왕이 맨 처음 주장한 것처럼 A부터 Z까지 다 납득한 이후에야 생기는 게 아니다. 지금을 초월하고 싶다는 욕망과 초월의 가능성은 동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한계를 통렬하게 인식하고 그 외부를 구하는 순간, 외부로 나아가는 가능성의 문이 이미 살짝 열린다. (활짝은 아니다. 문을 활짝 열려면 실제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 달라이라마는 지구상에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등장한 후에야 비로소 신(神)도 가능했다고 말했다. 존재가 자신의 유한성을 통렬히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무한에 대한 상상력도 가능해진다. 몸이라는 업을 짊어진 우리가 몸이 주는 고통에서 떠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몸을 끝없이 사유해야 하는 것처럼. 주어진 현실의 공성에 “전념”하는 것,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불사의 영약”이다. 남은 것은 이를 행하는 일이다. 밀린다왕도, 우리도!


“나가세나여! 그렇다면 세존 붓다의 감로, 즉 불사(不死)의 영약이라는 가게는 어떤 것입니까?”

“대왕이여! 세존은 감로를 설하셨습니다. 세존은 그 감로를 이 세계에 들이부으셨습니다. 그 감로를 가지고 관정(灌頂)을 받은 신들과 인간들은 태어남*늙음*병*죽음*근심*슬픔*괴로움*번뇌*번민으로부터 해탈하셨습니다.

그 감로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신체에 관한 전념(專念)입니다.”

같은 책, pg.255




2021. 6. 15. / 화엄경과 현대과학 s.2 ; 밀린다왕문경 2 발제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