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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음을 떠나 동심으로 l 이탁오, 『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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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8-16 09:17 조회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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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음을 떠나 동심으로


이윤하(글쓰기학교 고전평론반)


명나라 말기, 유학자들은 세속이 ‘아닌’ 도, 이단이 ‘아닌’ 유학을 표방하며 정치와 지식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그렇지만 열두 살부터 ‘노농노포론’이라는 ‘이단’적인 글을 쓰며 유학의 시대에 등장한 이탁오는 고고하게 시대를 풍미하던 유학이 속에서부터 썩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유학자들이 욕망과 도리를 분별하면서, 성인의 학문과 이단을 분별하면서 자신들의 존립 근거로 삼고 있던 ‘옳음’이라는 것은 애초에 ‘학문’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유학은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유학, 그것은 학문인가? 유학자, 그들은 배우는 자인가? 이탁오의 질문은 유학의 근본을 흔든다. 앞에 있는 개를 따라 짖는 개가 되지는 않겠다던, 공자든 부처든 누구에게든 ‘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배우고자 했던, 그 반평생이 스승이자 지기를 찾아가는-되어가는 궤적이었던 이탁오의 삶은 그 자체로 유학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유학은 ‘낡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지금도 그의 삶-질문은 작동될 수 있다. 옳음, 의리(義理)와 도리(道理)의 추구는 그 자체로 의리와 도리를 배반하는 모순적인 것이라 말하며, 오히려 의리와 도리를 버리는 배움,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한 배움을 말하는 이탁오의 말은 심한 개인주의자인 우리에게도 낯설다. 아니 위험하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에 기대어 있고, 옳은 삶을 살고자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옳게 살아야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탁오의 말대로 이 옳음이 ‘거짓’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기대어 떳떳하게 살 수 있는가?



1. 배움과 옳음의 충돌

이탁오 역시 유학을 공부했다. 다른 유학자들처럼 과거 공부를 하고, 관직생활을 했고, 혼인을 하고, 딸린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했다. 그러다 나이 마흔, 양명의 학문을 만나고 그의 공부는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다. 늘 그의 첫 번째 독자였던 초횡, 마음이 잘 맞았던 경정리를 비롯해 함께 학문을 논할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죽음이라는 문제를 시시각각 마주하며 도학과 불교도 공부하게 됐다. 쉰 넷에는 아예 관직을 그만두고 가족들도 다른 곳에 맡겨둔 뒤, ‘도를 구하는 자’로 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을 가기로 한 이즈음부터 그와 시대의 사이에는 불화의 싹이 슬슬 자라났다.


그 불화가 가장 활짝 피어났던 사건이 바로 『분서』 출간 전후로 약 10년간 이어졌던 경정향과의 갈등이다. 두 개인의 갈등이었지만, 그것은 곧 ‘이단’과 유학의 싸움이기도 했다. 많은 제자를 이끌고 유세를 떨치던 당대의 훌륭한 유학자와, 그다지 흠 잡을 데 없는 그를 이상한 이유로 물어뜯던 이단아의 싸움. 그 이단아가 물어뜯은 것은 유학자의 ‘그름’이 아니라 ‘거짓됨’이었다. 당신, ‘옳은’ 말을 하고, ‘옳은’ 것을 가르치고, ‘옳은’ 삶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들은 다 가짜다! 이 말은 어떻게 성립될 수 있을까?


유학은 천리(天理)를 따르고, 성인으로 살고자 하는 학문이다. ‘본래’ 그 학문이 어떠했는가는 모르겠지만 명나라 말기에 유학의 ‘천리’와 ‘성인’이라는 것은 그것의 반대항을 분별해냄으로서만 가능했다(천리는 인욕이 아닌 것, 성인은 범인(무지한 자) 혹은 이단(미혹된 자)이 아닌 것이다). 경정향은 이탁오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인륜과 처자식을 저버리는 짓이라 비난했다. 경정향은 공자의 말만 진정한 성인의 말씀이라 생각했으며, 학문을 통해 ‘무지’한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교화시키는 것이 유학자 자신들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유학자-관리로 사는 것만이 유일하고 무이한 ‘옳은’ 길이다. 그 밖의 다른 삶은 ‘그른’ 것이며, 다른 ‘배움’은 불가능하다.


이탁오는 갸웃한다. 그 길이 당신에게는 유일하고 무이한 길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럴까? 또 ‘나’ 아닌 것들을 색출하고 배제하는 운동성만을 보여주고 있는 그 유학이라는 것은 무엇을 배우는 학문인가?


사람이 모두 성인인 까닭에 성인께선 특별히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도리를 따로 갖지 못하셨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모두 부처인 까닭에 부처도 일찍이 중생을 제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중생의 상(相)이 없는데 어디에 인상(人相)이 있으며, 도리(道理)의 상(相)이 없는데 어디에 아상(我相)이 있겠습니까? 나의 상이 없으므로 능히 자신을 버릴 수 있고, 타인의 상이 없으므로 남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강요하지 않더라도 사람마다 모두 부처인 것을 직접 보고 나면 자신의 선을 남에게 베풀어 서로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지, 『분서Ⅰ』, 「경사구에게 답함」, 한길사, p164)


이탁오는 성인과 범인을 분별하기를 거부한다. 양명은 거리의 모든 사람이 성인이라 했고, 부처도 모든 사람이 부처라 했다. 공자는 자기를 배우라고 한 적이 없고, 특정한 학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순임금은 도공이든 어부든, 상대의 조건이 어떻든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는 바가 없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저 ‘배우라’는 것뿐이었다. ‘무엇’을 배우라고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 배우라고 하지 않았다!(중생이라는 ‘상’, 인간이라는 ‘상’, 도리라는 ‘상’은 실체가 아니다)


모두가 성인이고, 배워야할 것이 따로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옛 성인들은 왜 ‘배움’을 이야기했던 것일까? 그것은 배움이야말로 ‘옳음’의 운동성, ‘자기 구축’과 ‘배제’를 허물어버리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 배움의 운동 위에 있다면 ‘누구나’ 성인이다. 타자를 ‘나 아닌 것’으로만 취급하지 않는 것, 대신 순임금처럼 자기를 내려놓고(克己) 타자의 ‘선’을 자신에게로 취해오는 것, 그것이 배움이고 성인됨이다.


이때 내가 취해오는 상대의 ‘선(善)’은 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옳음이 아니다. 내가 ‘배움’이라는 성인의 운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상대가 도와주기 때문에 ‘선’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일방적인 관계 대신, 배움을 공생산하는 동시적인 관계가 있다. 학문은 어떤 주체가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출발할 수 있고, 해야 한다.



2. 동심, 분별하지 않는 마음

좋다. ‘옳음’이라는 것은 누구 입에서 나오는지도 모른 채 모두가 좇아가지만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추구하다보면 우리 자신에게 좋다기보다는 그저 ‘옳음’ 그 자체만이 존속되고 커지는 요상한 가치라는 것을 알았다. ‘옳음’을 말하는 한 우리는 비대해진 ‘옳음’에 빌붙어 권력을 얻고 싶은 명나라 말기 유학자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 ‘나’를 비우는 ‘배움’의 운동은 어디로 향할까? 이 운동을 이탁오는 자기를 위한(爲己), 자기완성을 위한 학문이라고 했다. 도교와 불교, 출가와 재가, 읽기와 쓰기 등등은 자기완성으로 가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리에서 출발해서, 자기로 돌아가는 학문. 그것이 바로 처음 마음인 동심(童心)을 회복하는 학문이다.


대저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무릇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버린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갖게 되는 본심을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게 되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최초의 본 마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동심은 왜 느닷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원래 그 시초는 듣고 보는 것(聞見)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안에서 사람을 주재하게 되면 동심이 없어지는 데서 발달한다. 자라서 도리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사람의 내면을 주재하게 되면 어느덧 동심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같은 책, 「동심설」, p348~349)



동심은 최초의 마음이고, 하나인 마음이고, 진실한 마음이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 잘 갖고 있었는데, 듣고 보는 것이 많아지다 보니 잃어버렸단다. 바깥에서 들어온 이래라, 저래라 하는 앎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쥐락펴락하기 때문이다. 이 앎들 속에서 ‘옳음’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따라가느라 동심을 아예 잊어버린다. 이어서 명성은 아름답고, 나쁜 평판은 추하다고 알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좋은 것은 드러내고, 못한 것은 가리려는 노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듣고 보는 순간부터 자기와 타인, 좋음과 나쁨, 이익과 손해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듣고 보기 전, 우리 최초의 마음은 이런 것들을 분별할 줄 몰랐다. 선과 악을 나누지 않는 지극한 선이었다. 이 지극한 선은 위에 썼듯 배움이 촉발되는 순간 나타난다. 내가 배움으로써 상대는 선해지고, 상대는 내가 ‘베푼’ 선을 더욱 분발시키게 된다. 이렇게 함께 배움을 생산하며 하나가 될 때, ‘동심’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또 명성이나 이익이 필요하지 않다. 점점 더 취할 수 있는 선이 많아질수록, 곧 점점 더 나의 견문을 내려놓고 높은 견식 속에서 분별함이 적어질수록, 나는 많은 것들과 함께할 수 있어지기 때문이다. ‘옳음’이 자신이 서있는 곳을 점점 좁게 만든다면, 동심은 그것을 점점 더 넓혀간다. 그러므로 그 마음은 아주 ‘편안’한 마음일 것이다.


‘그건 내가 아니야!’라거나 ‘이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는 분별이 적을수록, 그 마음은 더욱 ‘진심’으로 사람과 상황을 만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은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었기에 모든 존재와 모든 욕망에게 세상에서 맞는 자리를 찾아줄 수도 있었다. 성인의 축은 하나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의 수만큼 다양한 것이다. 옳음에 기댈 수 없어졌으니, 이제 수많은 축을 가지고, 수많은 배움의 관계를 만들어보자. 나를 고집하지 않을수록 우리의 마음은 진실되고 떳떳할 것이다.



(2021. 07. 17. / 글쓰기학교 고전평론반 2학기 최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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