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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끝! 3학기의 시작입니다. 세미나를 하던 당일에는 개학이 실감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아~ 장밋빛 방학이여^^!)
영어수업
오랜 만에 만난 굴드 선생님은 낭만주의 비판으로 글을 시작하십니다(저는 장밋빛 과거로 여름밤에 먹는 레모네이드와 쿠키를 꼽으신 것을 비판하고 싶습니다만. 레모네이드와 쿠키라뇨! 안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이 좋았지~하며 과거를 추억할 때 우리는 “추한 것을 떨쳐버리고 예전의 삶과 환경을 우리 좋을 대로 재구성”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노스탤지어는 합리적 이해의 가능성을 흐”리기 마련이죠. 그래서 “무한한 상업적 착취의 장”을 제공합니다.(스티븐 제이 굴드, 김명남 옮김, <여덟 마리 새끼 돼지>, (현암사), 293쪽)
그러면서 이러한 사례를 지난 아이오와 주 아마나 정착촌 여행에서 목격했다고 말합니다. 19세기 중반 설립된 아마나 마을은 독일 경건주의자(pietists)들이 세운 것으로(그들을 True Inspirationists라고 한다고 합니다^^;), 종교박해를 피해 구대륙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아마나는 공동식당에서 밥을 먹고, 화폐를 쓰지 않는 등 “진정한 공동체적 사회”였는데요. 대공황으로 경제난이 발생하고, “소비재 사유를 바란 젊은이들이 일으킨 ‘청년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대변화(Great Change)”라고 일컫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치되어 있던 종교와 경제가 분리되고, 농장과 가게와 공장의 일이 주식회사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인데요.
이러한 “대변화” 이후, 아마나 마을은 겉으로 보면 여전히 “단순하고 고상한 셰이커 스타일(simple and elegant in Shakeresque fashion)”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낭만적 과거의 목가적(bucolic)이고 전원적인(agrarian) 단순미를 홍보함으로써 관광객들 호주머니를 여는 가게들”로 먹고사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향수 어리고 목가적인 이미지를 상품화한 것이죠.(같은 책, 294쪽)
낭만주의와 낭만주의를 이용한 상업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 이 글이 앞으로 어떻게 생물과 진화의 이야기로 나아가게 될지 궁금합니다^^! 굴드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진화생물학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덤으로 알게 되는 재미가 있는데요. 풍요로운 경험이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물론 저희에게도 굴드 선생님에게 지지 않는^^! 줄자 샘이 계시죠! 이날 수업에도 단어의 용법과 뉘앙스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 인상적으로 단어를 기억할 수 있는 자료들을 한 보따리 가져와 주셨는데요^^
‘Blubbery’(저희가 블루베리로 읽어버린)가 나오는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셨고요(물론 직접 노래로 불러주실 때가 더 많습니다^^ㅎㅎㅎ 줄자 샘은 뮤지컬 영화를 모두 꿰고 계신 것 같아요. 단어 하나에도 주크박스처럼 술술 노래가 나옵니다^^). 아마나 마을 인터뷰를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마나 마을 영상 보는 중. 배웠던 단어들이 나와서 제법 들리는게 신기했어요!
“단순하고 고상한 셰이커 스타일(simple and elegant in Shakeresque fashion)”의 목가적(bucolic)이고 전원적인(agrarian) 단순미를 느껴볼 수 있도록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책을 가져와 보여주시기도 했고요!
윤하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줄자샘 소장서
목가적(bucolic)이고 전원적인(agrarian) 풍경^^
그런데 가구가 너무나 제 취향 ... 예쁘지 않나요...
덕분에 영어수업시간마다 문화와 역사(그리고 뮤지컬^^!)에 대한 이해가 점점 넓어지고 풍성해지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물론 굴드 선생님이 주의를 주신 것처럼 낭만화해서는 안되겠지만요!
절차탁마
이번주 발제는 저와 호정이었고요. 둘 다 모두 밧디야 장로의 게송을 골랐습니다. 왕족의 자손이었던 장로 밧디야는 출가 한 뒤 “아, 행복하다. 아, 행복하다.”를 외치며 다녔습니다. 이에 동료 수행승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왕년(?)에 비단옷을 입고, 맛난 쌀밥과 고기가루(?)를 먹었던 밧디야가 수행생활에 만족할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혹시 몰래 맛난 쌀밥을 먹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 동료 수행승들은 세존께 이 사실을 알립니다. 세존께서는 장로 밧디야를 불러들여 정말로 행복하다고 외치고 다니느냐 묻습니다. 장로 밧디야는 사실이라고 말하는데요. 통치자 시절, 최상의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고 견고한 성에서 살았지만 늘 두려웠던 밧디야였으나, 출가 후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두타행에 관한 게송을 읊습니다.
호정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도 인간이 가진 원초적 두려움을 없앨 수 없으며, 두타행의 수행이 그 두려움을 없애주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두타행은 어떻게 밧디야 장로의 두려움을 없앴을까요? 호정이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두타행 중에서 탁발을 중심으로 풀어보았는데요.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탁발은 내가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발우에 무엇이 담기든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원하는 것이 없게되면 그것을 잃거나 얻지 못해 두려워지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근영 샘께서는 먼저 ‘문제가 무엇인가? 혹은 장로나 부처님은 사건을 어떻게 문제화하고 있는가?’를 찾아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거기서부터 사건/문제의 본질을 추출할 수 있어야 생각을 진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현상적인 것만을 보기 때문에 이입이랄까 공감이 안 되는 것이죠!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여 보편화 시키지 않으면 특수한 경우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이러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나와 상관없이 느껴져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이번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호정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조건이 나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밧디야의 경우 모든 걸 갖췄지만 행복은커녕 늘 두려움과 혼란 속에 살았죠. 반대로 조건에 얽매이지 않게 된 순간,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 오히려 만족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만족이나 행복은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몸과 마음에서 온다는 것이죠!
이렇게 사건의 핵심을 찾아 보편화하면, 나와 내 주변의 삶 혹은 사회에 적용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밧디야에게는 그 ‘조건’이 비단옷과 쌀밥이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것일 수 있겠죠.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고, 명예나 인정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같은 밧디야로 집착에 대해 썼으나 너무 추상적이며, 저의 언어가 아닌 말들로 채운 글이라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착’이 무엇인지 정의해보라고 하셨는데요.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자주 쓰는 말인데, 막상 정의하려고 보니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모든 것은 인연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죠. 우리 또한 세포 등등이 일시적으로 모여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를 구성하는 것들이 흩어지면 ‘나’라는 사건도 끝이 나죠. 죽음입니다. 이 흩어짐을 두려워하는 것, 모여 있는 상태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하여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나(我)’라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생겨나는 순간이 ‘집착’의 순간입니다. 이 ‘나我’는 내 신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데요. 물건도 될 수 있고, 음식도 될 수 있고, 견해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라고 여기는 것이죠.
정리하자면 나라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생기는 것이 집착입니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기에 분노나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이고요. 이를 반대로 말하면, 나에게 분노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나의 아상이 있는 겁니다.
나의 힘으로 사유하고, 나의 언어로 글을 쓰는 그날을 향해! 앞으로도 쭈-욱 절차탁마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