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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공부 자립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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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글리] 3학기 5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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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라보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9-10 23:59 조회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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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emaker and Morning Star


드디어 14번 에세이, ‘Shoemaker and Morning Star’가 끝났습니다! 이번 에세이는 “선택적 기억을 먹고”사는, “과거에 대한 어리석은 낭만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됐었죠. 과거를 낭만화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또한 과거의 문제도) 외면하게 만들거나, 상업적 착취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로 굴드 선생님은  아이오와 주 아마나 정착촌으로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세운 이 마을은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고, 화폐를 쓰지 않는 등의 "진정한 공동체"였는데요. 대공황 시기, 아마나의 공동체 시스템은 ‘대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일종의 주식회사 형태가 된 것이죠.


대변화 이후, 아마나 마을 전체가 목가적인고 전원적인 과거의 낭만을 파는 가게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마나라는 냉장 회사를 마을 한 가운데 숨긴 것만 봐도 이러한 목가적 이미지는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럼에도 과거에 대한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향수의 힘은 강력합니다. 굴드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죠. 평화롭고 느긋한 전원 마을의 분위기에 취한 굴드 선생님은 공짜 루바브 술을 마시며 노스탤지어에 빠져듭니다^^; “에세이 마감도 없고”, “원자폭탄도 안전벨트도 없는 세상. 정직한 노동에서 흘리는 땀 말고는 괜스레 진땀 낼 일 없는 세상”이여!


그러다 죽은 아이들의 묘석을 만나 노스탤지어의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데요.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아이의 묘석에서부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을 두고 죽은 여섯 형제의 묘석을 보며 “대오각성”하게 된 것이죠.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전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원자폭탄도, 에세이 마감도요! 하지만 한편으로 현대의학과 같은 기술의 발전은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굴드 선생님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이었는데요. 지난주 까지만 해도 도대체 이 이야기가 진화생물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싶었습니다만. 이번 주에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Lamarckian and Darwinian styles of change explains why cultural transformation can be rapid and linear, while biological evolution has no intrinsic directionality and follows instead, and ever so much more slowly, the vagaries of adaptation to changing local environments.


라마르크식 변화와 다윈식 변화에는 이런 근본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문화적 변형은 급속하고 직선적일 수 있지만 생물학적 진화는 내적 경향성이 없다. 그저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변덕을 아주 천천히 부릴 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김명남 옮김, <여덟 마리 새끼 돼지>, 현암사, 307쪽)


아시다시피 라마크르식 변화는 ‘획득형질의 유전’을 말하죠. 말 그대로 한 개체가 일생동안 필요해 의해 특정 형태나 성질을 발달시키며 이를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겁니다. 높은 나무의 잎을 먹기 위해 기린의 목이 점점 길어진 것을 그러한 예로 들곤 하는데요. 하지만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이 유전의 특성을 밝힘으로써 획득된 형질은 유전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라마르크의 이론은 오류로 판명되게 되죠(최근에는 후성유전학의 등장하면서 라마르크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다윈주의적 자연에서는 이러한 내적 경향성이 작동되지 않는데요. “우리가 정신과 육체의 개선에 어떤 노력을 쏟았든 후손은 문화 전수의 도구들을 사용해서 바닥에서부터 새로 기술을 익혀야”하죠.


하지만 굴드 선생님은 생물학적 진화에 있어서는 다윈식의 진화가 맞지만, 인류 문화에서는 라마르크의 이론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자기 삶에서 궁리해내거나 개선한 것을 기계나 문자 지침을 통해 후손에게 직접 물려”줍니다. “세대마다 더하고 개량하고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기술적 인공물들에게 진보적 성격을 부여”하죠. 물론 그렇게 개선된 기술이 늘 우리의 삶이나 환경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굴드 선생님은 아마나의 묘지 앞에서 문화적 변형과 생물학적 진화의 차이에 대해 일종의 명상을 하신 것인데요. 묘지의 이름(이것도 에세이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었는데 빠뜨렸네요. 에세이를 읽어보시길!)에도 있었던 ‘구두장이(문화, 기술)’와 ‘샛별(생명)’, 이 두 시간성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제가 재미있었던 짧은 문장을 소개해드릴까합니다.


Technological progress is often less ambiguous and more linear.


굴드 선생님은 기술의 ‘진보progress’는 대체로 덜 모호하고less ambiguous 더 직선적more linear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문장이 재미있었는데요. 마치 ‘모호한 진보’가 있다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모호하다고 할까요? 무언가 분명히 규정되지 않을 때, 그래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때입니다. 그럼 진보가 보호하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요? 진보라고 볼 수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이걸 진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는 대체로 ‘직선적인 진보’입니다. 굴드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죠.


“internal standards of design and efficiency, not by resulting benefit to human life or planetary health.”


설계와 효율의 내적 기준이 발전한다는 뜻일 뿐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이나 지구 건강에 대한 편익이 증가한다는 뜻은 아니다(같은 책, 305쪽).


디자인과 효율의 ‘내적 기준’이 발전한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성능이 개선되고, 더 복잡하고 정교해진다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어떤 방향성 내지는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더 부합하는 쪽으로 발전해가는 것이죠. 그래서 직선적linear니다. 반면 생물학적 진화는 목적이나 방향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변덕을 아주 천천히 부릴 뿐”이죠. 그래서 모호ambiguous하다고 할 수 있죠. 오히려 특정한 방향을 가지고 고도로 복잡해진 경우, 어떤 특정한 환경에 최적화된 경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굴드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런 사례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진화의 방향이 내적 방향성을 가지든 모호하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진화의 결과가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게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모호한 다윈주의식의 진화는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우주에서 참신한 것들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급격한 환경 변화로부터 모든 생명체가 전멸할 위험이 적습니다.


당장 정리되지는 않지만, 진화, 변화, 발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말 문화와 생명의 시간이 다른 것일까? 싶기도 하고요. 어쨌뜬 희가곡 <미카도>에서부터, 아마나 공동체의 역사, 특이한 작명 센스, 라마르크 대 다윈식 진화 등등을 망라한 흥미로운 에세이었습니다. 다음 에세이도 기대가 됩니다 :)





절차탁마


이번 절차탁마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글을 써오지 않아 다시 한 번 이번 글쓰기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1. 개념을 4-5줄로 정의하기. 어떤 개념에 대한 정의를 책에 있는 언어로 그대로 베껴서 정리하는 것이 아님. 해당 개념의 어떤 지점을, 어떤 차원을 다룰 것인지 자기 나름대로 소화된 언어로 정리할 것.


2. 해당 개념의 어떤 측면에서 내 경험을 보고 싶었는지, 삶의 어떤 지점을 탐색해서 볼 수 있을지. 해당 개념을 사용하여 일상의 구체적인 차원을 탐구할 것.


철학적 개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현상을 개념화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쉽게 철학적 개념과 우리의 삶을 떨어뜨려놓고 생각하게 되죠. 플라톤의 이데아, 본질주의를 비판하지만 우리가 쉽게 그런 식의 사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개념을 가지고 일상을 연결시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어떤 현상을 봐야 하고, 어디를 탐구해봐야 하는지 막막해지게 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훈련이 필요하다고요.

매번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할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마음이 퐁퐁, 아니 콸콸 샘솟습니다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안 해버릇해서(?) 그런 것이겠죠^^ 저처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한 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절차탁마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선생님께서는 자꾸 다짐만하지 말고 그냥 하라고 하시지만^^;;) 달팽이와 진솔양의 글을 기대해봅니다^^ 모두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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