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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공부 자립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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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청년고전학교 s.2_1학기_1주차 후기(토요반, 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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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16 20:36 조회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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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30 고전학교 시즌1의 첫 후기를 썼었는데, 이번 시즌2 의 첫 후기도 쓰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의 시작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면 대화는 상대의 말을 이어받아 진행하는 편이고, 수업 시간에는 앞자리보단 뒷자리가 좋다(이건 다른 이야기 일 수도 있다), 무언갈 시작하기 전 뜸을 들일 수 있을 만큼 들이다가 더 이상 지체되면 안될 때가 되어서야 시작하곤 한다. 이런 내게 '첫 후기'라는 시작의 스텝을 밟게 해주었 듯, 깨봉에서의 활동은 내게 생소한 리듬을 겪을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이 느낌이 이날 배운 내용들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미솔샘의 안내로 공간을 둘러본 학인들은 2층 감이당에 모였다. 이날도 역시 많은 선생님들께서 새로 공부를 시작하는 학인들을 환영해주기 위해 자리해주셨다. 웃음과 데면데면함이 공존하던 자기소개가 끝난 뒤, 2030 고전학교 시즌2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1교시, 장자(문리스샘) vs 니체(이수영샘)

문리스샘께서는 '장자'의 텍스트 중 '소요유 逍遙遊' 를 소개해주셨다. 내겐 글자조차 낯선 소요유를 아주 쉽게 표현하면 '한가롭다, 아득하다, 놀다'와 같은 의미라고 한다. 소요유의 한자에는 모두 '쉬엄쉬엄 갈 착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장자가 말 그대로 전쟁 속에 살던 춘주[전국]시대의 인물인 만큼, 출퇴근 전쟁, 입시 전쟁, 주차 전쟁 등 치열한 경쟁과 갈등에 휩싸여 사는 우리에게 장자의 소요유 정신은 전쟁으로 인한 긴장과 피로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소요유의 첫 구절인 곤과 붕에 관한 이야기로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었다. 커다란 물고기인 '곤'은 커다란 새 '붕'으로 변하여 북쪽 바다에서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문샘께서는 이 이야기에서 변화를 중요한 부분으로 꼽으셨다. 장자가 말하는 '놀다'와 '변화'는 어떤 관계성을 갖고 있는가? "변화와 놀다 중 어느 것이 먼저 입니까?" 라는 물음에 문샘께선 "놀다는 변화 위에 있는 것."이라고 답하셨다. 즉 놀다의 바탕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변화가 어떻게 놀이가 되는가?

여기서 니체의 '도덕'이 등장한다. 이날 니체를 알려주신 이수영샘께서는 니체의 '자기 극복' 역시 '극기'를 통한 한계 돌파가 아닌 놀이의 차원으로 볼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운동장에서 어린애들이 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구경해보라. 한 아이가 공을 높이 차서 띄운다. 떨어진 공을 잡은 다른 아이는 갑자기 공을 들고 뛰기 시작하고,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를 쫓아간다. 아이들의 '규칙(도덕)'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만약 같은 일이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왜 합의도 없이 규칙을 바꾸냐!'는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놀이란 규칙(도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도덕을 벗어나는 것이 놀이라고...?' 도덕과 놀이의 연관성이 내게 확 와닿지 않았다가 지난 날 내가 겪었던 일을 떠올려보니 뭔가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평일에 쉬기 힘든 우리 회사의 특성상 관공서를 이용하려면 근무 시간에 양해를 구하고 다녀오거나 점심시간을 이용해야 한다. 세 달 전쯤, 우연한 기회로 평일에 회사를 하루 쉬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우체국을 이용했는데, 평일 오후에 아무런 제약 없이 우체국을 이용하는 것이 몇 년 만인지! 그 경험이 아주 생소하고 기쁜 느낌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대단한 일탈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평소(규칙/관습/도덕)에서 벗어난 그 리듬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아, 이것이 도덕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이구나'. 나는 '놀이'에 어떤 고정된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었어서 도덕과 놀이의 관계가 잘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카드 게임이나, 공놀이, 컴퓨터 게임, 친구들과 노는 것. 하지만 니체가 말한 놀이는 도덕에서 벗어나는 것이 었다. 우리는 도덕(학교, 회사, 일)과 전혀 무관한 행위를 할 때에 '논다'고 생각한다. 퇴근하면 술을 한 잔 하고 하교하면 지긋지긋한 책은 제쳐놓고 공놀이를 하거나, PC방에 가서 게임을 한다. 마음먹고 휴가를 떠나면 일상에서는 전혀 접하지 않을 것들을 채워넣는다. 고급 시설을 갖춘 숙박시설, 빼어난 경관, 줄서서 먹는 맛난 음식 등등. 도덕이 우리 삶에 자리한 영역이 넓고 깊은 만큼 그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놀이'는 더욱 일상과 괴리가 큰 것들이 되어가는 것 같다. 평일에 우체국을 이용하던 그날은 내게 즐거운 경험이었고, 그 자체로 '놀이'였다. 고전학교 첫날 배운 장자의 '변화'와 니체의 '도덕'을 연결 지어보니 두 철학자가 말하던 '놀이'의 개념이 정리된 듯하다. 더 잘 놀기 위해, '놀이'의 가치 평가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2교시, 조별 세미나_'계몽의 시대'를 읽고

토요 반은 인원이 열 명이 넘어가기에 2개 조로 나뉘어 조별 토론을 진행했다. 나는 미솔샘이 이끄는 2조에서 토론을 참여했다. 고전학교 첫날이기에, 아직 서로의 이름조차 외우지 못한 상태였으나 '계몽의 시대'가 한국의 근대에 대한 이야기, 즉 우리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세미나가 진행될수록 토론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그중 기억에 남은 내용들을 정리해본다.


토론은 각 장 별로 흥미로웠던 구절이나 키워드들을 나누고 그것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1장에서

'속도는 빠르기가 아니다.'라는 구절로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근대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다.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의 발명과 근대의 합리주의와 결탁한 자본주의는 '시간은 곧 돈이다'라는 명제를 낳는다. 이 명제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자본의 가치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거해서 뭐 할껀데?', '그걸로 돈이 돼?' 즉 경제활동을 벗어난 활동은 무용지물이라는 인식을 가져온다.


일(노동)하지 않는 자 = 돈을 낭비하고 있는 자

일하지 않는 자 = 게으른 자


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명제는 오히려 언뜻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구나! 라는 희망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주체를 우리가 아닌 생산성(돈)으로 바꿔 놓는다. 이것은 토론 중 조원분들이 나눠 주신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잠자는 게 아까울 때가 있다.', '속도를 내 것이라 생각했다(많은 일을 해야 할 때, 내 마음껏 속력을 올리고 늦출 수 있다고 여겼다는 맥락에서)', '공스타그램(학생들이 자신의 빡빡한 공부 스케쥴을 깔끔하게 정리한 표를 SNS에 공유하는 문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등등 시간을 대부분 생산성의 측면으로 사용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에서 시간의 주체가 전도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모습이' 멋있는 것'으로 추앙되는 사회 분위기 또한 주체의 전도를 부추긴다.



-2장에서

목적과 비전의 차이점에 관해 이야기 나눈 부분이 기억난다.


인간은 목적의식이 없을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즉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필요한데, 중세까지는 그 역할을 '신'이 담당했다. 신이 인간에게 '소명'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은 존재 자체로 존귀한 자가 되었다. 진화론의 등장으로 인한 신의 죽음은 곧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를 잃게 된 것과 다름없다. 이 대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니체 같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신이든, 철학이든 인간은 살아야 할 이유(목적)가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인간이)목적 없이 살 수 있을까?',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가장 괴롭다' 등등 목적을 이룬 뒤 또 다른 목적으로 달려가는 삶은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들지만, 신의 죽음 이후 좌절에 빠진 사람들처럼, 목적 없는 삶 역시 상상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여기서 '목적과 비전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목적은 도착지가 있지만, 비전은 끝이 없고 방향만 있다', 혹은 '비전의 아래 항목에 목적이 들어있다'라는 의견들이 나왔다. 특히 비전은 '동사'고 목적은 '명사'다 라는 말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전은 행위(동사) 그 자체에 의미가 있고, 목적은 우리가 지정한 무언가(명사)에 닿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동사와 명사의 쓰임에서 그 차이가 더 두드러지는데, 동사의 주체는 '내'가 될 수 있다. '걷고', '먹고', '자는' 주체는 바로 나다. 반면 명사는 내가 아닌 대상을 지칭한다. 컵, 화성, 의자 등등 여기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내 컵'과 같은 예외의 경우를 제외한 명사의 기본적인 쓰임만 본다면). 그러므로 '내'가 소외된 목적, 즉 명사로 향해가는 여정은 나를 지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지녔다. 내게 비전 설정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한 토론이었다.


1교시 장자vs니체 강의가 끝난 뒤 질문 시간에는 예상 시간을 초과할 정도로 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함께 공부하게 된 선생님들의 열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선생님들과 함께할 공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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