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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대중지성, 금강경을 만나다 | 무아(無我)의 연습, 보시(布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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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6-21 12:51 조회1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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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민(감이당)

1. 재보시(財布施)는 단지 출발일 뿐

네 가지 상을 무너뜨린 보살이 해야 할 수행의 첫 번째이면서 보살 되기의 조건이 바로 보시다.

보시는 세 종류가 있다첫째는 재시(財施)로서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돈이나 재물로 보시하는 것으로 외보시(外布施)라고도 한다둘째는 법시(法施)로서 정신적인 것이다지식을 전수하거나 지혜를 계발시키는 것 등이 모두 정신적 보시로서 내보시(內布施)라고 한다셋째는 무외시(無畏施)이다고통이나 어려움으로부터 구해내는 보시이다.”

보시란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한다. 우선 보시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쉽게 볼 수 있는 재보시(재시)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얼핏 보면 재시(財施)야말로 너무 보편적이고 실천하기 쉬운 것 같다, 그러나 극도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재시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교환의 원리만으로 움직이는 머릿속에는 손익계산서가 지나치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것을 대가 없이 주는 것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이라 내게는 손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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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 영원히 나의 것이라 생각하여 돈이 내 주머니에서 나가면 나에게 크나큰 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집값을 예로 들어보자. 집값이 오르면 손익계산서에서 플러스가 되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전제, 돈에 대한 믿음이 있다. 집값이 떨어지거나 내가 집을 판 다음에 집값이 오른다. 이 경우, 나의 손익계산서가 마이너스가 되고 우리는 일어나지도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착각한다. 마땅히 내 것인 돈을 잃었다는 손해 의식에 빠진다. 이것이 현대인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손익계산서는 우리의 상상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회로를 만든다.

보살이라 함은 나와 타인의 구별이 없으니 당연히 모든 손익계산서는 무용하다. 이런 앎을 깨우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받으면서 끊임없이 내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내보내는 순간 보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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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봤을 때 불교의 보시 원리는 사회에서 말하는 공동 윤리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빈곤 아이들이나 노인들을 지원하는 기구 혹은 구세군 냄비에 누구나 한 번쯤은 소액의 돈이라도 넣어본 기억은 다 있을 것이다. 워낙 인터넷이 발달되어서 지구 저편의 아프리카 아이들의 굶주림에 쉽게 접할 수 있다. 또 자선 단체들도 많아서 재보시를 실천하기 좋은 조건에 살고 있다. 남을 도와주고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도덕을 학교에서 충분히 배워서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사회를 위해 나누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기 것을 내놓지 않으려고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눈곱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는 스크루지 영감 같은 구두쇠들도 많다. 또 한편으로는 보시를 일상생활에서 습관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역시 많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교 용어로 보시를 정의하자면 보다 더 깊은 차원의 탐구가 필요하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또한 수보리야보살은 대상에 얽매임 없이 보시해야 한다. <중략수보리야보살은 반드시 배운 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앞서서 ‘네 가지 상’을 무너뜨린 이가 보살이라고 말했듯이, 보살은 보시를 할 때도 이 ‘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상에 얽매임 없이 하는 보시’다. 매우 특이한 부분이다. 나는 너에게 베풀고 있고, 너는 나에게 베풂을 받고 있는 대상이라는 개념과 구분 자체도 없애버리는 것이다. 상(相)이 없는 보시!

2. 나의 보시 흑역사(黑歷史)

도대체 ‘대상에 얽매임 없이 하는 보시’가 무엇일까? 사실 보시에 대한 글을 쓰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내가 꼭 쓰고 싶은 내용이 나의 과거 보시 사례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대상에 얽매임 없는 보시’를 깊게 들여다보려고 한다.

처음 불법을 만났을 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불교의 진리를 만나는 인연이 ‘백 천만 억겁 만에 태평양의 눈먼 거북이가 나뭇등걸의 구멍에 머리를 내밀어 숨 쉬는 것만큼 귀한 일’이라는 게송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과거의 업장으로 먼지가 수북한 상태라 그 먼지를 털어야 진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시가 먼지를 닦는 방법 중 하나이며 공부하는 스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말이 내 귀에 강렬하게 꽂혔다. 그래서 나는 보시를 많이 해서 업장이 하루빨리 줄어야 불교의 진리를 제대로 만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나는 보시를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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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가 먼지를 닦는 방법 중 하나이며 공부하는 스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말이 내 귀에 강렬하게 꽂혔다.

첫 보시는 불교 스승으로 소개받은 큰 스님의 대웅전 대들보 신축 공사에서 시작되었다. 대들보는 절의 기초이니 이런 불사에 보시한다면 내 공부의 기초도 튼튼해지리라 믿었다. 더불어 부처님처럼 6년 고행을 하지 않아도 쉽게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액을 보시하라는 권유에 나는 기꺼이 전액을 보시했다. 빨리 부처님 법을 깨달아 막연한 허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또한 나는 스승이 시키면 이 정도는 한다는 뿌듯함도 작동했다. 이후에는 이혼 재판이 제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방 스님들에게 수많은 음식 공양을 올렸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나의 보시는 지속되었다. 미국에 선원을 만들어 제자를 양성한다는 스님을 찾아갔다. 나는 이 스님의 지도를 받으면 내가 공양했던 선방 스님처럼 나도 공부를 잘할 줄 알았다. 차가 없으신 스님에게 자동차를 보시하고 부지런히 공부했다.

이렇게 나는 누군가 나에게 깨달음을 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면 자동으로 막 퍼주는 보시를 했고 도반에게도 무조건 베풀었다. 재산을 타인을 위해 흘려보내는 것이야말로 말로 재보시에 걸맞은 일이라 생각하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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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는 일일이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한테 많다. 이를 잘 들여다보니 ‘보시를 많이 많이 하면 빨리 깨닫겠지!’하는 나의 욕심이 보인다. 이렇게 아상이 작동하는 마음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불교의 진리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다.’를 듣고 나는 사실 두려웠다.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변해서 지금 누리는 행복이 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불법을 만났으니 이 이치를 깨달으면 사라지고 변하는 행복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궁극적 진리를 깨달으면 지극한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두려움은 곧 집착과 조급함으로 바뀌었다. 하루라도 먼저 깨달아 허무에서 자유롭고 싶어 ‘무작정 많이 퍼주는’ 것이 곧 내게는 보시였다. 보시하는 행위의 밑바닥에는 ‘나는 이 정도는 한다.’라는 아상은 물론이고 결과에 빨리 도달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었다. 즉 대상에 얽매여도 너무 얽매인 보시였다. 이혼을 겪었을 때는 제발 재판이 끝나기를, 이후에는 선정에 들어서 이 모든 괴로움이 단번에 사라지기를 염원하며 계속 보시했다. 결국 나는 부처님이란 상(相)을 붙잡고 허무와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는 방편으로 보시를 했던 것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대상에 얽매임 없이하는 보시’와 달리 나의 과거 보시 사례는 욕망에 얽매인 보시 흑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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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겪었을 때는 제발 재판이 끝나기를, 이후에는 선정에 들어서 이 모든 괴로움이 단번에 사라지기를 염원하며 계속 보시했다.

불교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들어봄직한 야사가 생각난다.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 양무제와 달마대사의 만남이다. 양무제는 불교에 심취하여 국고를 탕진할 만큼 불사(佛事)를 했다. 그가 인도에서 ‘선(禪)’을 전파하러 온 고승 달마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양무제는 자신이 인도의 아쇼카왕처럼 불사를 많이 한 업적을 자랑한다. 그러고는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겠냐고 달마 대사에게 질문하였다. 달마 대사는 한마디로 “無”라고 하였다.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해진 양무제와 태연한 달마대사를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재물을 아무리 많이 내놓아도 자신이 한 것을 생색낸다면 결코 보시의 이치를 깨달은 자가 아닌 것이다. 이를 달마 대사는 “無” 한 마디로 정리해버렸다. 결국 대상을 두지 않는 응무소주(應無所住)의 마음이 보시의 원칙이다. 부처님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금강경에서 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부터 재보시보다 한 층 높은 차원의 보시, 법보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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