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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메디씨나 지중해 | 첫 번째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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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05 14:49 조회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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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해 완

끝이 안 날 것 같던 학기도 끝이 났다. 내심 마음을 졸였던 재시험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나는 공식적으로 UAB의 ‘재학생’이 되었다.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집에 돌아오자 제프리가 말했다. 세수도 안 한 것 같은데 보이는 얼굴인데 어째 빛이 난다고. (세수 안 한 건 사실이었다.) 학기 동안 종종 툭 튀어나와 불거졌던 이마의 정맥도 (해리포터의 이마 흉터를 연상시켰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날 점심을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잤는데 어찌나 달았는지 모른다.

끝을 내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침의 흥분은 벌써 사라져 있었다. 시험공부처럼 재미없는 고행(?)을 할 때는 그 끝에 찾아올 자유를 상상하게 된다. 모든 할 일을 마치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 그 기분이 얼마나 달콤할까? 그런데 막상 끝이 나면 상황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여상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밀린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이번 여름 시댁 (말레이시아) 방문이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준비할 것도 많았다. 또 방학이 시작되면 기숙사를 완전히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짐도 싸기 시작해야 했다.

끝을 맺었다는 실감이 났던 것은 오히려 그동안 미뤄두었던 생각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길에 막 들어선 초입자가 그렇듯이 나는 지난 일 년 간 주어진 환경에 무조건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까딸란어를 배우고, 틀린 문제의 점수를 두 배로 깎는 이상한 채점 방식을 받아들이고, 자유 시간을 없애버리는 빡빡한 시간표를 따랐다. 미션은 성공했다. 아직도 까딸란어는 많이 부족하지만,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없이 까딸란어로만 빽빽이 채워진 마지막 시험지를 문제없이 푸는 스스로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UAB 수업 첫날이 떠오르면서 감개무량해졌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교수님의 까딸란어에 얼이 빠졌었는데 그래도 이제는 최소한 읽을 수는 있네…

적응 기간도 끝났으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UAB 의대의 공부 방향이 어떠한지, 쿠바 의대와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이 변화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이다. 의학 공부를 이어갈 곳으로 스페인을 택한 것은 쿠바와 학제가 가장 비슷하고 또 쿠바 의학을 가장 인정해주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장소의 차이점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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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서

공부 : 통합 VS 분석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공부 방식에서 드러난다. 아바나 의대의 초점은 ‘통합’에 있다.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큰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는다. 막 학문에 발을 들여놓은 어린 학생 혼자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수업은 학기 내내 교수님의 주도적인 지도하에 이루어진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도제관계와 비슷하다. 튼튼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교수가 끌어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학생 입장에서는 공부하기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세미나는 매주 몇 시간씩 꾸준히 열리고, 그 시간 동안 교수님의 간섭과 잔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이런 통합교육의 단점은 정보의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것,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반복학습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금방 까먹게 된다. 또한 시험의 변별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역이용하여 공부를 대충하고 시험만 통과하는 게으른 학생들이 나타나게 된다.

UAB 의대의 공부 스타일은 정반대다. 이곳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은 ‘분석’이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잘게 쪼개서 가르친다. 각 부위를 어찌나 자세하게 설명하는지, 현재 나는 쿠바에서 배운 내용들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와서야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많다. 각기 다른 과목에서 같은 정보를 몇 번씩 반복해서 듣기 때문에 기억에도 잘 남는다. 그렇게 꾸준히 기억 속에 새기다보면 나중에는 이 정보들이 저절로 통합되면서 학생 혼자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디테일한 정보를 아무렇게나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중간 중간에 삽입된 실험실 활동을 살펴보면 학생 혼자서도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한 스텝씩 알려주겠다는 의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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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단점이라면 재미가 없다는 것, 학생과 교수 사이의 교류가 적고 학생 홀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요구되는 공부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 이를 충분히 소화할 시간을 확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빡빡한 학사일정에 지쳐 나가떨어지고, 무조건 암기만으로 시험을 보거나 아예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도 생긴다. 이렇다보니 끝까지 살아남아 통합의 능력까지 갖추게 된 학생들은 극소수가 된다.

양쪽을 모두 경험해본 입장으로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두 가지 스타일이 완전히 반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배우든 간에, 거시적인 지도와 미시적인 디테일을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그 분야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해와 암기, 통합과 분석, 변화와 반복은 이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모두 필요한 과정이다. 암기해야만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만 암기할 수 있다. 분석한 후에야만 깊이 있게 통합할 수 있고, 통합을 전제로 해야만 의미 있게 분석할 수 있다. 변화 없는 반복은 죽은 지식일 뿐이고, 반복 없는 변화는 낱낱이 흩어질 정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UAB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정규 교육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재미부터 쫓는 내 성정 때문이다. (내가 왜 고등학교를 자퇴했었는지 케케묵은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 학기 내내 나는 내 마음의 외침소리를 잠재우느라 쩔쩔맸다. 내 세미나를 돌려 달라! 내 재미를 내놔라! 안 그러면 의대를 탈출해서 다른 학과 세미나실에 잠입이라도 하겠다!

일상 : 의생활 VS 개인생활

UAB에 와서 또 아쉬웠던 것은 아바나 의대에서 매주 네 시간씩 실천했던 ‘꼰술또리오 당직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꼰술또리오에서 나는 동네 주민들이 가족주치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몸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행운을 누렸다. (생각해보니 이건 전 세계에서 오로지 쿠바 의대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여기 학생들 역시 스페인의 꼰술또리오라 할 수 있는 ‘깝(CAP)’에 방문하긴 한다. 그렇지만 횟수가 현저히 적다. 고작 일 년에 세 네 번뿐이다. 또한 바르셀로나의 깝은 아바나의 꼰술또리오와 달리 동네 네트워크와 엮여 있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의 의(醫)생활을 디테일하게 들을 수 있는 창구가 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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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사촌 월터와의 만남

이 아쉬움이 오히려 나의 지난 경험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생로병사를 통과하는 일상의 이야기, 즉 의생활이 의학에서 얼마나 중요한 배움의 자료인지를 말이다. 교실에 앉아서 백날 ‘올바른 의사-환자 관계성’ 강의를 들어봤자 별 소용이 없다. 의사가 자기 자신 또한 언제든지 환자가 될 수 있는 동등한 호모 사피엔스로 인식하지 않는 이상 이 둘 사이의 갭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인식을 위해서는 의사와 환자 모두가 속해 있는 공통의 현장, 즉 의생활에 대한 강력한 감각이 필요하다. 쿠바에서는 ‘동네 주민’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이 이 감각을 키우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의사도 환자도 결국 같은 동네에서 동고동락하는 주민이고,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서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바르셀로나의 일상에는 이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앞으로 의생활을 학교 바깥에서 적극적으로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생활에 대한 감각과 경험을 축적하는 것은 의학 공부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학교가 이 핵심을 제공할 수 없다면 학교 바깥의 네트워크로 넘어가야 한다. 생로병사의 의생활은 쿠바에서나 스페인에서나 동일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직선을 휘어뜨리기

시험을 마무리하고 나는 제프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파리, 로마, 그리고 티라노(스위스 국경 지대에 있는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각각의 장소마다 만난 사람들이 달랐다. 파리에서는 프랑스어로 비교 문학을 공부한 옛 친구를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로마에서는 제프리와 가장 친한 사촌과 함께 여행을 했다. 그리고 티라노에서는 제프리가 쿠바에 살 당시 룸메이트였던 이탈리아인 로베르토와 그의 쿠바인 아내 가브리엘라를 만났다. 나는 이 둘의 쿠바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티라노에서 나는 참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가브리엘라와 쿠바 이야기를 시작하자, 잊고 있었던 자잘한 기억들이 계속 떠오른 탓이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당시에는 별 것도 아닌 것 같았던 사건들이 나에게 장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쿠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곳의 여러 문제점들이 기가 막힐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야말로 삶의 맨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망상을 버리고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일 때 만나게 되는 삶의 얼굴은 결코 매끈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삶의 재미와 거룩함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 나는 나의 이런 기억들과 배움의 편린들을 가브리엘라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쿠바에서 제대로 마무리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속에 고여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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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만지고 있는 가브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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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노에서

티라노를 떠나면서 나는 지난 일 년 간 새 장소에 적응하느라 지쳤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내 안에 고인 쿠바의 아쉬움을 내가 앞으로 살게 될 바르셀로나에 창의적으로 흘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현장은 내가 쿠바를 떠나는 순간 어차피 마주하게 되었을 현실이다. 그 시기가 당겨졌을 뿐이고, 이 현장이 재미가 없으면 내가 재미를 만들면 된다.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학교 공부가 지루해 보인다면 그 선이 부러지지 않는 선에서 이리저리 휘게 만들면 된다.

그 순간 여름이 지나고 UAB에서 시작하게 될 두 번째 년도의 목표가 저절로 수립되었다. 바로 ‘삐딱해지기’다. 공부의 밀도는 유지하되 방법을 뒤집고, 학기 내내 최선을 다해 딴 짓을 궁리해보려고 한다. 쿠바가 내가 의학을 사랑하도록 해준 장소라면, 바르셀로나는 이 의학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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