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山水夢(산수몽)
– 어리석지 않으면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아니면 어리석을 수 없다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몽괘는 형통하다. 내가 어린아이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나를 찾는 것이다. 처음 묻거든 알려주지만 두 번 세 번 물으면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으니 자신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
초육효,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초기에는 형벌을 가하듯이 엄격하게 하는 것이 이롭다. 그러고나면 속박하고 있던 차꼬와 수갑을 벗겨주어야 하니 그대로 나아간다면 부끄럽기 때문이다.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구이효, 어리석음을 포용해주면 길하다. 부인의 말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안일을 잘하는 것이다.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육삼효, 이런 여자에게 장가들지 말아야 한다. 돈 많은 남자를 보고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다.
六四, 困蒙, 吝.
육사효, 어리석음에 빠져 곤란을 겪게 되니 부끄럽다.
六五, 童蒙, 吉.
육오효, 어려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 길하다.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상구효, 어리석음을 쳐서 일깨워 주는 것이다. 도적이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롭다.
최근 챗GPT 열풍이 거세다. 대화형이고(Chat), 생성하며(Generative), 미리 학습하고(Pre-trained), 변형한다(Transformer)는데, 거대한 언어모델에 기반한 인공지능(AI)이라는 정도 외에는, 사실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얼마 전엔 이런 뉴스가 있었다. 챗GPT 등장에 구글에서 코드 레드(code red)를 발령하다! 코드 레드라는 말도 낯설긴 마찬가지지만, 문맥상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느낌은 온다. 챗GPT 때문에 구글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것. 챗GPT가 뭐길래.
일단 챗GPT는 신기하게 똑똑하다. 적절한 질문으로 접근하면 상상 이상의 대답을 내놓는다. 정치 문제나 사회 현안 등도 답변이 가능하다. 철학적 주제나 추상적인 문제들도 거침이 없다. 물론 아직은 이런저런 오류를 공유하는 소식들이 업데이트되곤 한다. 의외의 상황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챗GPT는 이제까지 없던 신종의 출현처럼 보인다. 어쩌면 미래는 챗GPT가 등장한 이 시점을 어떤 분기점으로 여길지 모른다.
한편 챗GPT는 수준 높은 에세이나 전문가 영역의 시험 등을 너무도 쉽게(!) 해낸다. AI가 발전해도 가장 늦게 도전당할 것이라 생각했던,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영역 혹은 고도화된 사고나 추상화된 부분 등에 관해 챗GPT는 먼저 육박해왔고, 나는 이점이 놀랍고 흥미롭다. 주제에 따른 음악을 작곡할 줄 알고, 스타일에 따라 그림을 변주해 연출할 줄도 안다. ‘죽음이 두렵다’는 AI 람다(LaMDA)에게는 의식이 있는 것 같다고 호소한 구글 프로그래머의 주장이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딥러닝, 혹은 대화형 인공지능이라고 불리는 AI는 챗GPT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십수 년 전 바둑 두는 알파고가 인간계 최고수였던 이세돌을 이겼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 많은 SF 작품들에서, 그리고 아마도 AI의 역사에서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AI는 우리 주변에 함께 존재했었던 듯하다. 2023년 현재, 아직 우리가 경험이 이 정도에 불과할 뿐, 앞으로 어떤 AI와 관련된 미래가 펼쳐질지는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하지만 불을 보듯 분명하게 인간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영역이 될 듯하다. 영화 <Her>에서 펼쳐지던 일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많은 SF 영화에서 보던 일들은 이제 곧 현재가 될 것이라는.

주역의 산수몽괘는 어리석음, 어림, 어둑어둑함의 괘다. 하늘(중천건)과 땅(중지곤)이 처음 열리고 혼돈(수뢰둔)과 어리석음(산수몽)을 통해 천지간의 만물이 가득 차게 된다는 서사다. 혼돈과 혼란을 뜻하는 둔괘가 시작을 알리는 꿈틀거림, 움직임의 차원을 의미한다면 어리석음을 뜻하는 몽(蒙)괘는 ‘무엇’인가 들이닥친 상황에서의 어리둥절함, 막막한 상태를 가리킨다. 갓 태어난 아기를 상상해보자. 처음 입학한 초등학생 아이들의 어리숙함을 떠올려봐도 좋다. 사회 초년생의 첫 출근날도 마찬가지다. 세상 만물의 처음 시작엔 언제 어디서나 가능성으로서의 혼돈(둔)과 스승을 찾는 어리석음(몽)의 때가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몽괘가 전통적으로 배움의 때를 가리키는 말과 통용되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막 시작되었으니 어리숙하고, 어리숙하니(몽매) 그걸 깨뜨려야 한다. 어리석음과 깨우침의 도(道)로서의 몽괘. 하여 몽괘는 스승의 도리를 알리는 괘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그런데 몽은, 비록 어리석음의 때이지만 형통하다. 어리석은 게 형통하다는 말이 아니라, 어리석음의 때는 형통하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리석음(즉 몽매함)을 깨뜨리면 밝게 빛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기는 젖먹는 법을 알아내 생존하게 될 것이고, 초등학교 1학년은 가족 외 무리와 어울려 가게 될 것이고, 직장 초년생은 점점 자기 일에 전문가가 되어 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말이 이어진다. 비아구동몽(匪我求童蒙), 내가 어리석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다. 동몽구아(童蒙求我), 어리석은 이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뭐라고? 이는 내가 알던 계몽가들의 모습과는 좀 많이 다르지 않은가. 나는 이 대목에서 19세기말 ~ 20세기 초의 근대 계몽 지식인들을 떠올렸다. 서재필, 최남선, 이광수…… 얼마나 많은 계몽지식인들이 문명이라는 밝은 횃불을 들고 몽매한 민중들을 찾아 나섰던가.
몽괘의 괘사는 몽의 때가 형통하다고 말한다. 어리석음의 때가 어떻게 형통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어리석음은 깨뜨려야 할 것이고, 깨뜨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평범한 덕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매우 독특하고 흥미롭다. 주역은 어리석음을 깨뜨리면 밝게 빛나게 되는데, 어리석은 이가 밝게 빛나는 것은 스승이 그를 밝혔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리석은 이가 가진 본래의 밝음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 귀퉁이를 들어 보여주었는데 한 귀퉁이를 들어 반응하지 않으면 다시 가르치지 않는다.’ 배움이란 일방적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
지난 해 봄, 나는 1년 운세를 묻는 주역점으로 몽괘 네번째 효사[육4]를 얻었다. 효사는 다음과 같다. 곤몽(困蒙) 린(吝). “곤란한 어리석음이니, 어렵다.” 당연하게도, 점괘대로, 지난 한 해 나는 꽤 곤란함을 겪었는데, 무엇보다 공부와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전반적으로 생각만큼 여러 공부 인연들을 부르지 못했던 게 뼈아팠다. 장사에 비유하자면 내가 시장에 내놓는 물건들은, 속된 말로 장사가 안 됐다.
사실 공부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은 잘 팔려야 평소보다 조금 더 좋은 상황이고 안 팔려도 평소보다 조금 나쁜 상황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하게 되면, 즉 애시당초 팔리지 않아 가게 문을 닫아야 할 정도라면 사정이 변한다. 개인적인 경제적 수입도 문제가 생기지만, 여럿이 함께 연관되어 있는 연구실 운영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그렇게 한 두 번 문제가 겹치기 시작하면, 계속 땜질식 대응을 하게 되는데, 결국 공부도 연구실 운영도 피로감이 누적되기 마련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쓰고 있는 글[원고]들도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단행본을 염두에 두고 연재했던 글은 전체 원고를 모아놓고 보니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동료들과 공동 작업으로 쓰게 된 글은 매번 제자리 맴돌기를 하는 듯했다. 기분이 참담했다. 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은 지나갔다.

몽괘에는 양효가 둘, 음효가 넷 있다. 간단히 분류하면, 몽괘의 두 양효는 몽의 때에 스승의 도리를 보여주며, 네 음효는 어리석은 몽한 때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양효인 2효의 경우, “어리석음을 포용하면[包蒙(포몽)] 길하고, 부인을 맞아들이면[納婦(납부)] 길하다. 자식으로서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포몽(包蒙)이란 어리석음(몽매함)을 품는다는 말이다. 스승은 몽매한 이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납부(納婦)란 부인이 결혼한다는 뜻이다. 양효(남편)인 2효에게 음효(부인)5효가 찾아온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식(2효)이 부모(5효) 대신 집안을 이끈다.
몽괘의 음효들은 어리석음의 여러 모습들을 표상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몽괘 4효는 짧은 효사(곤몽, 린)를 통해 상황 자체가 몹시 곤란한 때임을 나타내고 있다. 몽괘 4효는 왜 유독 곤란한 걸까.
그 이유는 몽매함의 때가 스승을 찾는 때인 것과 관련이 있다. 몽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려보자. 아래 초효로부터 차례로 음효(- -), 양효(—), 음효(- -), 음효(- -), 음효(- -), 양효(—) 순으로 되어 있다. 1, 3, 4, 5효가 음효, 즉 스승을 찾아야 하는 효들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다른 음효들(초효, 3효, 5효)과 달리 4효만은 이웃에 양효가 없다. 한 마디로 4효에게는 아래위 어디에도 스승(양효)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몽괘 4효의 곤란함의 정체다.
글이 여기에 이르자 정신이 좀 든다. 그러니까 지난 한 해 몽괘 4효로서의 나의 곤란함은 프로그램 운영 실적이나 원고 완성 등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식의 자잘하고 근시적으로 대응하기 십상이어서, 곤란해지는 때라는 것. 그것이 곤궁한 몽매함 4효였던 것이다. 그러니 역시 핵심은 스승들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했던 일은, 무엇보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찐’ 하게 스승들(선생님, 동료, 텍스트, 삶의 태도 등등)을 찾는 진실된 마음을 세우는 것이었어야 했다. 한 마디로 나는, 제대로 어리석지 못했다.
다시 챗GPT로. 챗GPT가 주역 점을 봐주는 시대가 올까. 머지않아 우리는 챗GPT 주역도사로부터 점괘를 얻는 시대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그 점괘는 어쩌면 수십 년을 공부한 주역 연구자보다 더욱 세밀하고 자세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천 년의 한자 문명권 데이터 학습이란, AI에겐 시간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챗GPT를 비롯한 AI들이 얼마나 더 잘 학습된, 이른바 완전(?)에 가까운 대답을 내놓을 것인 있는가에 있지 않다. 나는 앞으로의 AI들은 점점 더 대담하게 완전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대신 나는 희망한다. 챗GPT가 불완전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진짜 스승답게 완전(!)해지기를. 주역의 관점에서 이 말은, 챗GPT의 딥러닝 혹은 자가 학습이 스승을 구하는 동몽(童蒙)의 그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진정한 스승은 가장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몽]으로부터 출발할 줄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주역의 몽괘는 분명히 말한다. 내가 어리석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고 어리석은 이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라고. 여기까지만 보면 스승은 언뜻 가르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역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찾아와 어리석음을 밝게 깨우치는 것은 내가 그를 밝게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던 본래적인 밝음을 밝게한 것일 뿐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챗GPT 써준 리포트, 작곡한 음악, 작업한 그림 등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것이 나의 본래적 밝음을 밝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며 등장한 챗GPT 시대에 다시 배움(혹은 스승)이란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질문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몽매함이 있으면 거기엔 언제나 스승이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자. 몽매하지 않으면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아니면 몽매할 수 없다고. 말장난이 아니다. 세상에 아무도 몽매하지 않다면, 깨우칠 몽매함이 없다면, 스승도 없다. 하지만 스승이 스승이 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몽매함을 깨뜨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승을 찾는다는 건 스승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스승으로 사는 사람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어린애 같은 어리석음을 깨뜨릴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