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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선악 저편에 현장의 주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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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호두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7-10 09:52 조회1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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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저편에 현장의 주인을 찾다.







재겸(읽생 철학학교)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몇 년 전부터 필리핀 농민들이 생산한 설탕을 교역하고 있다. 그런데 민중교역은 시작단계에서 부터 내부적으로 논란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국내 농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단체의 취지를 어기는 일이라 수입품인 설탕은 취급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설탕은 제국주의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식민지에 재배를 강제하여 시작된 물품이다, 그 산물인 설탕을 필리핀 농민들이 생산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려면 설탕을 아예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필리핀 농민에 대한 생활이 걱정된다면 기금을 직접 조성하여 전달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설탕 취급을 찬성하는 주장도 있었다. 설탕 구매가 국내산 농산물을 덜 소비하는 쪽으로 이어지지도 않으니 단체의 취지를 어기는 것은 아니다, 타인들을 돕기 위해 구매를 모으는 일이야 말로 단체에 취지와 부합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름의 정당함을 근거로 각자의 주장을 했다. 문득 논의의 근거들을 차분히 되짚고 싶어졌다. 주장하는 논의의 근거는 원칙이나 가치의 정당함에 있었다. 그런데, 그 정당함의 근거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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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이 아니라면?


어떤 질문은 멀리서부터 온다. 원칙이 서 있는 근거를 물을 수 있었던 건 철학자 니체를 읽으면서였다. 니체는 삶을 철저하게 긍정한 철학자이다. 그가 사유한 ‘운명애’는 삶의 긍정으로부터 나온 산물이다. 살아간다는 일은 매순간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말과 같다. 생명에게 정지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삶을 긍정한다는 건 차이를 긍정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과오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하고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위험한 것은 한 독단론자의 과오, 즉 순수 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해 낸 플라톤의 과오였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니체, 『선악을 넘어서』, 청하, 22쪽)


그 변화를 니체는 생성이라고 했다. 생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건 무언가 고정되어 있는 것,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생각 아니겠는가? 어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끈질긴 생각, 그 진리로부터 삶을 재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철학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삶과 별개로 절대 선이라는 가치가 있다는 생각, 이를 니체는 독단론이라 불렀다.


절대적 진리 추구에 삶을 예속시키고 나면 삶은 보이지 않는다. 그 진리를 파악하고 나면 인생의 모든 의문이 풀리고 고뇌를 여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정작 삶을 죽인다. 독단론을 떠나야 매순간 달라지는 삶을 볼 수 있다.


‘선악’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무엇이 정의로운가?’는 내게는 ‘인생질문’이었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물어 본 적은 없었다. 마치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에 나를 의탁한다는 감각이랄까? 흥미로운 건 그 가치의 근거를 묻지 않고 평생을 그 가치 위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통찰은 우리를 다른 지점에 서게 한다. 현재 매일 다른 나로 살아가는 차이를 감각할 것. 선악은 차이를 생성하는 삶의 맥락 위에서만 존재한다. 그 사건이 나의 삶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한다면 선악은 근거를 잃어버릴 것이다. 옳고 그름을 묻는 문제의 장에서 빠져나오고 나면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질문으로 이행할 수 있다.




동정하지 말고 우정을 나누라!


살아있는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차이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생명은 타자와의 관계의 장위에서 차이를 생성해낸다. 힘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타자를 변용시키고 내가 변용된다. 그 변용이 일어나는 장이 신체이고 신체가 일으키는 감정이다. 삶이 달라지면 어떤 사건의 장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달라진다. 어떤 사건에서 한 신체는 슬픔을 느껴 위축되기도 하지만 다른 신체는 기쁨을 느껴 힘을 내기도 한다.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니체, 『아침놀』, 책세상, 136쪽)


‘동정’이라는 감정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흥미롭다. 약한 신체를 가진 자가 손쉽게 우월감을 맛보는 방식이 동정이라는 것이다. 동정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나의 감정을 충족하기 위한 기제이다. 그렇기에 동정에는 타인을 깔보는 감정이 숨어 있다. 어떤 이가 불행하다고 해서 스스로 극복할 힘조차 없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지 않을까?


더구나 동정의 감정은 서로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동정 받는 자는 계속하여 자신을 동정해줄 대상을 찾는다. 동정하는 자 역시 그 관계에 의존한다. 자신의 우월감을 손쉽게 세워 줄 수 있는 대상을 끊임없이 찾게 된다. 만일 진정한 도움을 주고 싶다면 상대의 의존성을 몰락시켜야 하지 않을까?



너도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면 너와 동일한 고뇌, 동일한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네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네 친구들에게만 도움을 주라! 그것도 네가 자신을 돕는 방식으로만 : 나는 그들을 더 용감하고, 더 인내하고, 더 소박하고, 더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다. 동정의 설교자들은 우정을 나누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338쪽)


어떤 감정은 예속적 방식으로 살게 하고 어떤 감정은 한 인간으로서 주인으로 살게 한다. 동정이 예속적 관계의 방식을 낳는다면 나와 상대를 주인으로 만드는 관계의 방식을 니체는 우정이라고 했다. 우정은 상대도 나와 같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알 때 생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믿을 때 우정이 싹튼다. 우정은 상대에 있는 강함을 만나게 하고 그 강함이 나를 고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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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필리핀 농민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원칙으로부터 시작한 논의는 현장성을 잃어버린다. ‘무엇이 정당한가?’ 라는 질문은 그 사건에 서 있는 사람을 결여시킨다. 현장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지 않는 원칙과 선악의 논의는 얼마나 허망한가?


어떤 논의든 현장의 맥락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설탕의 교역이 필리핀 농민들의 삶에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설탕을 취급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은 어떤 감각으로 그 농민들을 만날 수 있는지, 그 사건이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물어야 한다. 그 사건이 관계의 장 위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현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난 민중교역 포럼에서 한 필리핀 농민은 자립을 위하여 애쓰는 자신들의 삶을 소개했다. 필리핀 농민들은 제도적 보장이 모호한 속에서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정말 고군분투 해왔다. 한 농민은 지주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형의 목숨을 잃기도 했다. 나에게도 필리핀 농민을 약자로 보는 감정이 숨어있었나 보다. 그 사례를 들으며 필리핀 농민들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강자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가난을 약자로 환치하는 것은 얼마나 시대적인가? 오히려 자본과 제도에 의존하고 사는 우리들에 비하여 지주와의 전쟁을 마다 않고 자립의 길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강자가 아니겠는가?


살아가는 현장의 주인으로 사는 길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들의 우정이 나와 상대를 살아가는 현장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 물자의 교역을 자본이 만들어 놓은 길에 귀결시키지 않고 사람들의 우정으로 연결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교역을 자본의 방식에서 우정으로 전유하는 가치 창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대성이 나를 전유하는 것을 태연하게 허용하면서 산다. 니체는 그렇게 사는 것을 노예의 삶이라고 했다. 가치의 창조자로 시대를 전유하며 살 때 주인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매순간 살아 있음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을 떠난 어떤 진리에도 현혹되지 않고 현장에서 길어 올린 관점의 창조자로 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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